[씨줄날줄] ‘그년’/진경호 논설위원

[씨줄날줄] ‘그년’/진경호 논설위원

입력 2012-08-10 00:00
수정 2012-08-1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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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그녀’는 없었다. 제3자를 말할 때 우리 선조들은 남녀를 따지지 않았다. 3인칭 여성을 가리키는 이 말이 본격 쓰이기 시작한 때는 대개 1950년대 전후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양주동(1903~1977) 선생이 ‘신혼기’(1926)라는 작품에서 처음 ‘그녀’를 썼고, 한동안 ‘그네’ ‘그미’ ‘그니’라는 말들이 혼용되다 ‘그녀’로 정착된 것이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이런 ‘그녀’가 영 마뜩지 않았다. 19세기 말 영미 문학 바람이 일던 일본 문단이 영어 ‘he’와 ‘she’를 대신할 말로 ‘가레’(彼)와 ‘가노조’(彼女)를 만들었고, 이 가노조에서 우리 문단이 ‘그녀’를 끄집어 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왜색(倭色)이 짙은, 영어와 일어가 뒤섞인 뿌리 없는 말이라는 게 외솔의 생각이었다. 양주동 선생도 이런 지적이 걸렸던지 ‘그녀’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는 정작 자신은 ‘궐녀’(厥女)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그러나 ‘궐녀’ 또한 우리말은 아니었다. ‘그것’, ‘그곳’ 등 적당히 떨어진 대상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그’를 의미하는 한자 궐(厥)을, 당시 3인칭 대명사 ‘그이’로 사용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궐녀’를 제3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게 된 것이다. 외솔은 ‘어미’ ‘할미’ 등에서 따온 ‘그미’를 썼고, 이광수(1892~1950)는 소설 ‘무정’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라고 했다. 1974년 국어순화운동 전국연합회라는 단체가 ‘그녀’를 쓰지 말자고 캠페인까지 벌인 걸 보면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그녀’는 태어날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인 듯하다.

이런 ‘그녀’가 민주통합당 이종걸 의원으로 인해 입길에 올랐다. 지난 5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를 ‘그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 뒤로 거세지는 논란에 그는 “‘그녀는’의 줄임말이다. 나름 많은 생각을 했다.”(5일)라고 해명하더니 “‘그녀는’의 오타였다. 듣기 불편한 분들이 계셨다면 유감”(7일)이라고 다시 둘러댔다. 이후 “그년이란 말을 그냥 고집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의 제 내심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8일), “본의가 아닌 표현으로 심려를 끼친 분들께 거듭 유감을 표한다.”(9일)로 오락가락했다.

외솔이 ‘그녀’를 쓰지 말자고 했던 까닭의 하나는 ‘그녀는’을 발음하면 ‘그 년은’이라는 욕설로 들린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후대에 격 떨어지는 정치인 하나가 장난칠지도 모른다고 일찍이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이 의원의 조부는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12-08-1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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