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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의 아침] ‘비루한 충성’이 만연하는 사회/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비루한 충성’이 만연하는 사회/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김규환 기자
입력 2016-11-23 18:14
업데이트 2016-11-2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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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사상가 한비(韓非·기원전 280~233년)가 펴낸 ‘한비자’는 ‘제왕학의 전범’으로 불린다.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이 책은 전국시대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제왕들이 난세를 평정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을 명쾌하게 풀어냈다. 한비자의 ‘열 가지 허물’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 초공왕(楚共王)이 진여공(晉?公)과 언릉(?陵)에서 전쟁을 치렀다. 초나라는 패하고 공왕은 눈을 다쳤다. 전투가 한창일 때 사마(司馬) 자반(子反)이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찾았다. 시종 곡양(谷陽)이 술을 한 잔 가져와 바쳤다. 자반이 말했다. ‘이건 술이 아닌가? 물려라.’ 그러자 곡양이 말했다. ‘술이 아닙니다.’ 이에 그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자반은 사람됨이 모주꾼이었다. 일단 한 잔 들어가면 끝을 봐야 할 만큼 술을 좋아하는 그는 끝내 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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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전쟁은 초나라의 패배로 끝났다. 공왕은 전투를 다시 하려고 자반을 불렀다. 그러나 술이 덜 깬 그가 ‘가슴이 아프다’며 출전이 어렵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다급한 공왕은 말을 달려 자반의 막사를 직접 찾았다. 막사 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자 공왕은 말없이 되돌아왔다. 공왕이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내가 부상당해 믿을 자는 자반뿐이다. 그런데 그가 저렇게 취한 것은 자반이 초나라의 사직을 망각하고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 행동이다. 다시 싸울 기력도 없다.‘ 그러고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환궁했다. 공왕은 자반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한비는 “곡양이 물 대신에 술을 바친 것은 결코 자반을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를 충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루한 충성’이 ‘바른 충성’을 해쳐 오히려 자반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폄하했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는 ‘사일로(Silo) 충성’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사일로’는 원래 곡식 및 사료를 저장하는 굴뚝 모양의 창고인 사일로에 빗대어, 조직 부서들이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자기 부서 이익만을 챙기는 것을 일컫는 경영 용어이다. 이를 빌려 백악관 직원들이 대통령이나 국가라는 보다 넓은 범위의 목표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하는 정치 용어로 워싱턴 정가에 정착된 것이다. 사일로 충성, 즉 두목의 말이라면 깜빡 죽는 뒷골목 주먹패들의 너절한 충성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도 비루한 충성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대통령만 바라보며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만 노리는 집권당 대표와 친박 세력, “(회의나 면담을 통해 대통령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눠보니) 대통령이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는데, 대통령이 너무 많이 알면 국정이 일방적으로 경직되기 쉽다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며 호위무사로 자처한 직전 총리, 대권욕에 눈먼 나머지 사안별로 자기에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해 줏대 없이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대선 잠룡들, 최고 권력에 빌붙어 가이드라인에 맞춰 사명감 없는 수사로 일관하는 검찰이 바로 이들이다. 22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군상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걸 보니 ‘역사가 발전한다’는 말은 이제 믿지 않는다.

khkim@seoul.co.kr
2016-11-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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