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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기호’ 칠순의 노인 동심을 좇다

‘치유의 기호’ 칠순의 노인 동심을 좇다

함혜리 기자
입력 2017-02-20 23:00
업데이트 2017-02-2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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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열 작가 내일부터 ‘암시적 기호학’ 개인전… “그리는 것은 기술이 아닌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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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으로 밑칠을 한 캔버스에 숫자가 가득하다. 알록달록한 사탕, 새, 비행기, 빨간 고추, 넥타이 등을 그려 넣는가 하면 예쁜 단추, 플라스틱 포크, 놋 숟가락 등의 오브제를 붙여 놓기도 했다. 서툰 솜씨로 사람을 그리고 ‘친구야 놀자, 탕탕!’ 하고 천연덕스럽게 써 놓은 것도 있다. 어느새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오세열(72)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그림같이 순수하다. 그래서 볼수록 재미가 묻어나고, 보다 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걱정이 사라진다.
오세열 작가
오세열 작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22일부터 ‘암시적 기호학’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갖는 오 작가는 “붙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나는 대로 쓰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이 그러지 않느냐”면서 “내 마음이니 왜 그렇게 그리느냐고 묻지 말라”고 말한다.

“내게 그림은 기술이 아니에요. 즐겁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것이죠. 그림 그리는 행위는 즐거움이고 유희이며 유니크해야 합니다.”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그는 “사명감이나 책임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때 그리고 싶은 대로 한다”면서 “처음부터 어떤 이미지를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어서 어떤 작품이 나올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작품에 어떤 제목도 붙이지 않은 것도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즐겼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작품에 숫자를 새기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 이후 숫자로 가득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우리가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서 1, 2, 3, 4, 5를 쓰잖아요. 어느 날 그 생각이 났어요. 생각해 보면 숫자는 인간의 운명 아닙니까. 숫자 때문에 죽고 사는 사람도 많죠. 좋든 싫든 태어나면서부터 삶은 숫자와의 싸움이에요.”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눈이 하나이거나 다리와 팔이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이다. 그는 “문명의 급속한 발달 속에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며 “인간이 느끼는 불안함과 어두운 곳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담아 치유해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그리지만 그렇다고 쉽게 그리는 그림은 절대 아니다. 그는 밑칠을 중시한다. 광목천 위에다 기름기를 최대한 덜어낸 다양한 색의 유화물감을 덧칠한 뒤 나이프나 면도날, 날카로운 나무 등으로 물감층을 긁어내는 일을 반복해 작품을 완성한다. 캔버스를 몸처럼 생각한다는 작가는 물감을 덧칠하고 다시 긁어내는 작업을 수행처럼 느낀다고 설명했다.

단색 바탕에, 반복된 행위의 결과로 작품이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그를 ‘포스트 단색화가’로 분류하는 비평가들도 있지만 정작 그는 “내 입에서 ‘단색화’라는 말을 꺼내본 적도 없다”면서 손을 내저으며 “어떤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거나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오세열은 최근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등 외국 주요 도시에서 연 개인전과 아트페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오는 3월 홍콩아트바젤과 10월 런던 프리즈아트페어 참가를 앞두고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 주는 회고전의 성격을 지닌다. 서라벌예대 회화과 재학 시절인 1967년 전후로 그린 구상 작품들도 포함됐다. 전시는 3월 26일까지.

글·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2017-02-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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