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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니요 침묵·방관에서 깨어나야 변해요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니요 침묵·방관에서 깨어나야 변해요

이은주 기자
이은주 기자
입력 2017-03-03 22:36
업데이트 2017-03-0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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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글·그림 마리아 스토리안/강희진 옮김/북레시피/104쪽/1만 4000원
북레시피 제공
북레시피 제공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인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억울한 피해자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지만 성폭력 문제에서 피해자가 약자가 되는 부당한 현실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성폭력을 경험한 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그래픽 노블이다. 저자는 직접 인터뷰한 그들의 경험과 기억을 묶어 20가지 짧은 이야기와 삽화를 담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 남녀가 겪는 성희롱, 폭행, 성적 학대의 현장을 강렬하고 생생하게 전달한다. 일종의 성폭력 예방 프로젝트로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 가야 할 것인지 해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2016 SICBA(스코틀랜드 인디펜던트 코믹북 어워즈) 베스트 그래픽 노블상을 비롯해 2016 올해의 책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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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이야기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자행되는 눈에 띄지 않는 공격을 폭로한다. 지하철에서 어린 소녀의 치마 속을 더듬는 녹색과 주황색 손들은 흑백의 선 위로 서로 얽히고 겹치며 스멀거리는 느낌을 전한다. 책 속의 손자국은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피해자 마음속의 상처를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낯선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변덕에 따라 사적 혹은 공공장소에서 학대와 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한 여성은 첫 연애에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을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고 위로받았지만, 반년 뒤 바로 그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이 여성은 “배신감, 죄책감, 자기 혐오, 그때의 감정들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연인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데이트 폭력의 현장도 고발한다. 툭하면 손찌검을 하고 성관계를 거부하는 여자친구를 강제로 성폭행한 남성은 울며 싫다고 저항하는 여성에게 ‘울지 말고 즐기라’는 말로 언어 폭력을 가한다.

이뿐만 아니라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남녀 친구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성폭력,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서 부지불식간에 자행되는 성폭력은 물론 공공장소에서 노골적인 성적 농담을 던지거나 아무렇지 않게 신체적 접촉을 행하는 경우 등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여성만이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집요하게 스토킹을 하는 여성, 툭하면 자살 협박으로 남자친구를 위협하고 헤어진 남자친구 집에 몰래 들어와 성폭행을 시도한 여성도 가해자다.

저자는 우리(가해자)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고민 없이 저지르는 행동이 우리(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으로 전해지는지를 알려 준다. 동시에 폭력이나 학대의 희생자들에게는 결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서정적이지만 독특하면서 함축적인 그림체와 다양한 색채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책 말미에 ‘일러두기’를 통해 성희롱과 폭력의 희생자가 됐을 때 할 수 있는 일과 생존자를 돕고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문제의 근원이 여성의 존엄성 부족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피해자가 무시당하지 않고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다”면서 “피해의 생존자들, 방관자들이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기를 열망한다”고 밝혔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2017-03-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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