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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 화재’ 한순간에 잿더미 된 실향민의 꿈

‘소래포구 화재’ 한순간에 잿더미 된 실향민의 꿈

입력 2017-03-19 14:35
업데이트 2017-03-1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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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좌판상점 전소…오정숙 할머니 “빨리 복구만이라도…”

“저녁 9시쯤 들어가서 자는데 불났다고 전화가 와. 와 보니 다 타 버렸는데 들어갈 수도 없고…”

18일 새벽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에서 난 불은 이곳에서 수십 년 넘게 터전을 닦아 온 상인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태웠다.

3.3㎡(1평) 남짓한 시장 좌판에는 실향민 오정숙(75·여) 할머니의 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오 할머니는 이 좌판에서 하루하루 꽃게며 새우를 팔아 삼 남매를 키웠다.

“고생은 뭐…지나간 세월이니 이루 말하기도 어렵지”

6·25 전쟁이 벌어진 1950년. 8살 어린 나이로 북녘땅 황해도 연백군에서 넘어와 소래포구에 자리 잡을 때까지 그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오 할머니는 끝내 월남하지 못한 아버지 대신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27살 때 지금의 남편과 혼례를 올렸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쉽지 않았다.

남편이 하던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던 차에 소래포구(당시 노렴나루) 인근에 살던 동서에게 연락이 왔다.

‘이쪽엔 포구도 있으니 뭐라도 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란 말에 처음 소래포구에 발을 들였다.

1970년대 중반의 소래포구는 지금의 번성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시멘트 바닥도, 천막도, 좌판도 없었다.

‘다라이’(큰 대야) 하나만 갖고 무작정 장삿길에 나섰다. 흙바닥에다가 깔개만 깔고 시작한 장사였다.

그는 “그때는 지금처럼 시멘트도 안 깔렸고 그냥 갯바닥이었다”며 “좁은 땅에 매립이 시작됐는데 배가 돌을 실어 다 주면 상인들이 직접 돌을 날라서 메꾸고 흙도 파서 나르고 했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1974년 인천 내항이 준공되면서 조용한 마을이었던 소래포구가 ‘새우 파시’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먹고 살라고 애들, 어린 것들 떼어놓고 다니면서 바구니에 꽃게 갖고 다니다 보니 좌판도 벌이게 되고…”

새벽부터 나와 저녁별을 보며 집에 들어가는 생활만 10여 년이었다. 홀로 알뜰살뜰 장사를 꾸린 끝에 버젓한 간판이 달린 좌판도 얻었다.

가게 이름은 큰아들의 이름을 따 ‘상권 수산’이라고 했다.

오 할머니는 “‘상권네’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며 “그런 가게가 한순간에 시커멓게 타 버렸으니 심정이 어떻겠냐”고 울먹였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혼자 통곡하고 울고 그랬지만 어떡하겠느냐”며 “바라는 건 없고 그저 잿더미 빨리 치우고 영업 다시 할 수 있도록 얼른 원상복구만 됐으면 좋겠다”고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여러 시민이 와서 도와주시고 해서 정말 감사하다”는 그는 “그저 빨리 가게만 다시 운영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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