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옛 교통 요지’ 연천~파주 호로하길
경기 북동부의 연천은 오늘날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한적한 농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개경이 멀지 않은 수도권이었다. 서울에서 접근한다면 자유로나 통일로에서 37번 국도로 갈아타는 것이 빠르다. 문산에서 연천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두지교차로가 나오고, 최근 완공된 장남교로 임진강을 건너면 연천군 장남면이다.임진강 하류 쪽에서 바라본 연천의 고구려 성 호로고루. 오른쪽 강 건너 파주에는 신라 칠중성이 있다.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을 만큼 수심이 얕다.
이 안내판만으로도 연천이 구석기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임진강 중류에 해당하는 일대는 호로하(瓠蘆河)나 호로탄(瓠蘆灘), 혹은 표하(瓢河)로도 불렸다. 호로고루(古壘)는 호로하의 옛 성이라는 뜻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하류다.
이제는 남북한을 잇는 통로라면 누구나 자유로나 통일로를 떠올린다. 그러나 임진각 주변 임진강 하류가 남북 교통로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이후다. 1906년 용산에서 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놓이면서 임진강철교도 세워진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임진강철교는 1943년 경의선이 복선화되면서 하나가 더 건설됐다. 상류 쪽의 하행선 철교는 6·25전쟁 당시 폭파됐고, 남아 있는 철교는 상행선이었다.
호로고루에서 멀지 않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무덤.
짐작처럼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랜 중부지역의 남북 통로는 호로하 일대였다. 장남교 남쪽은 지금 파주시 적성면이다. 장남에 호로고루가 있다면 적성에는 신라 칠중성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적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와 남북으로 대치하던 전략적 요충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 유인궤가 병사를 이끌고 호로하를 끊은 뒤 신라 칠중성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호로고루 상류의 숭의전. 조선왕조가 고려 왕과 중신을 제사 지낸 사당이다.
호로고루에 올라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일대의 군사적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임진강은 호로고루 앞에서 급격하게 수심이 얕아진다. 갈수기에는 군데군데 모래벌판이 드러난 물줄기 사이로 얼마든지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신라의 칠중성은 호로고루에서 동남쪽 강 너머로 바라보인다. 오늘날의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삼국시대 양안에 주둔한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긴장은 엄청났을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은 호로고루에서 북쪽으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경순왕은 고려의 세력이 커지자 왕건에게 투항해 수도 송악에 머물며 경주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경순왕이 경종 3년(978) 세상을 떠난 뒤 신라계 주민들은 당연히 경주에 장사 지낼 것을 원했지만, 고려왕조는 사회불안 요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송악을 떠난 장례 행렬은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역사가 돌고 돈다는 것은 경순왕릉에서 임진강 상류로 15㎞쯤 떨어진 숭의전에서 실감할 수 있다. 숭의전은 조선왕조가 고려의 태조·현종·문종·원종과 복지겸·신숭겸·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정몽주 등 16공신을 제사 지내고자 지은 사당이다. 임진강이 발아래 펼쳐진 숭의전의 입지는 절묘하다. 송악의 동쪽으로 고려의 수도권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 제대로 부각되기는 쉽지 않은 오지다.
다시 하류로 내려온다. 호로하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소련제 T34 탱크를 몰고 임진강을 건넌 곳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주력 탱크부대는 도하한 뒤 적성을 거쳐 감악산을 넘었다. 이어 오늘날의 의정부를 지나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에 입성했다. 이 루트는 과거 임진나루길이 개척된 이후에도 여전히 남북 통로로 기능했다. 배를 타야 하는 임진나루길이 사람의 통행로였다면, 말이나 수레는 호로하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선시대에도 적성현의 중심은 칠중성 일대였다. 칠중성 아래에는 지금도 적성향교가 남아 있다. 이 일대는 땅 이름부터 구읍리(舊邑里)다. 예전에는 이곳이 읍치(邑治)였다는 뜻이다. 현재의 적성 시가지는 2~3㎞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감악산 넘어 조선시대 양주 관아(官衙)의 위치 또한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조금 생뚱맞다. 새로운 양주시청은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 평화로 옆에 세워졌지만, 국도에서 벗어난 조선시대 옛 관아지 주변은 한적하기만 하다. 지금 옛 관아지는 복원에 앞서 발굴조사가 한창 이뤄지고 있다.
그럴수록 양주 관아지와 양주향교 사이 별산대놀이마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주에는 별산대놀이와 소놀이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양주농악과 상여와 회다지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적지 않은 연희자와 많은 관객이 필요한 놀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활발하게 물산이 오가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북쪽에서 임진강을 건너 내려온 물산은 양주에서 다시 지금의 의정부를 거친 뒤 중랑천을 따라 남하해 서울 광나루(廣津·광진)에서 한강을 건넜다. 임진나루길은 최근 고양시와 파주시가 힘을 합쳐 의주대로라는 이름으로 탐방로를 조성했다. 호로하길도 같은 노력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의정부시, 양주시, 파주시, 연천군이 힘을 합치면 된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7-03-25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