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투명인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사라지는 마술이 특기인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엘리나 로웬슨)는 아들에게 평범한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대신 ‘나의 엔젤’이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그렇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는 걱정스럽다. 그녀는 아들을 마주한 채 한숨짓는다. “내가 없어지면 너는 어떻게 될까?”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 소년은 위태로워진다. 투명인간인 그의 존재를 긍정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는 한, 그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말 테니까.
‘나의 엔젤’
어머니는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는 강가 외딴 오두막에서 혼자 살라는 당부다. 그녀는 본인 외에는 투명인간인 아들과 제대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들이 홀로 지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타인에게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받기보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는 지킬 수 있는 고립을 택해라. 이것이 어머니가 생각한 최선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소녀 마들렌(10대 역할: 마야 도리)을 기다리려고 그는 이곳에 남았다. 이미 오래전 소년은 이웃에 사는 그녀(유아 역할: 한나 부드로)와 친구가 됐다. 어머니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마들렌은 시각장애인이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그녀는 오히려 소년을 잘 볼 수 있었다. 마들렌은 그의 미세한 숨소리를 듣고, 그의 희미한 체취를 맡아 그가 여기 있음을 안다. 그녀에게 소년은 투명인간이 아니라 ‘나의 엔젤’이었다. 어머니가 운명한 뒤 소년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이제 마들렌밖에 없다. 그런 그녀를 소년은 사랑한다. 마들렌도 지기인 그를 사랑한다. 한데 그녀가 집을 떠나게 됐다. 시력 회복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이별,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된 마들렌(20대 역할: 플뢰르 제프리어)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청년이 된 ‘나의 엔젤’을 애타게 찾는다.

영화 ‘나의 엔젤’의 감독 해리 클레븐은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더이상 본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더 본인이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말대로 사랑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실존을 생생하게 만든다. 시각에 국한되지 않는 여러 감각을 사랑이 자극해서다. 상대적으로 둔감하던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은 예민해진다. 그것이 합쳐진 복합 감각과 그것이 전이되는 공감각은 우리가 이토록 넓고 깊게 감각할 수 있는 ‘느낌의 주체’임을 자각시킨다.

‘나의 엔젤’ 연출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랑은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12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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