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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다큐&뷰] 신비의 소리 천년의 울림…장인의 손끝 열정의 떨림

[포토 다큐&뷰] 신비의 소리 천년의 울림…장인의 손끝 열정의 떨림

이종원 기자
입력 2018-04-01 22:14
업데이트 2018-04-0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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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범종 제작소를 가다

지난 2월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세계인의 축제이며 평화잔치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화려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지구촌에 울려 퍼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종으로 알려진 ‘오대산 상원사 동종(銅鐘)’(통일신라 725년·국보36호)을 표현한 ‘평화의 종’ 소리에 맞춰 개회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한 것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홀로그램 영상으로 구현하며 70억 세계인에게 ‘평화를 향한 염원과 희망’이라는 메시지로 감동을 주었다.

범종(梵鐘)은 사찰의 법구사물(法具四物) 중 하나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오랜 기간 만들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정교한 세부장식과 웅장한 울림소리로 동양 삼국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종 안에 추를 매달고 종 전체를 흔들어 소리를 내는 서양종과 달리 표면에 치는 자리를 만들고 그 부분을 당목(撞木)으로 쳐서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사람이 우는 듯 소리가 죽었다 되살아나기를 1분 넘게 반복하는 ‘맥놀이 현상’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을 일으킨다.
원광식 주철장이 범종의 제작 과정에서 주물틀과 거푸집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원광식 주철장이 범종의 제작 과정에서 주물틀과 거푸집을 해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백제 제철단지 진천… 원광식 주철장 평생 바쳐 신라 종소리 재현·7000개 종 제작

예부터 살기 좋은 고을이라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리던 충북 진천은 고대 철(鐵) 생산 유적지와 고대 제철로가 발견된 곳으로 일대가 철을 대량 생산, 공급했던 백제의 중요한 제철단지(製鐵團地)의 하나로 판단되고 있다. 원광식(77·국가주요무형문화재 제112호·범종제작성종사 대표) 주철장(鑄鐵匠)은 통일 신라의 종소리를 찾아 평생을 바친 장인이다. 경기 화성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종 제작을 업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8촌 형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17살 때, 충남 예산 수덕사가 광복 후 최대 규모의 종 제작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은 원씨가 범종 제작에 평생을 걸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범종의 모형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고온의 불로 문양의 불순물을 없애고 있다.
범종의 모형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고온의 불로 문양의 불순물을 없애고 있다.
종틀 위에 전통 밀랍 방식이 아닌 세라믹을 씌우는 방식.
종틀 위에 전통 밀랍 방식이 아닌 세라믹을 씌우는 방식.
원씨는 머리를 깎고 수덕사에 들어가 대웅전이 보이는 한구석에 주물공장을 세운 뒤 꼬박 3년을 보낸 끝에 “종소리가 30리를 간다”는 수덕사의 종을 완성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며 범종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어 나갔다. 하지만 옛날 장인들이 만들어낸 신비의 소리를 재현하지 못했던 까닭에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 천년의 종소리를 재현해 내겠다는 열망에 빠진 그는 종 제작 비법을 밝혀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절을 방문해 일제가 빼앗아간 신라·고려시대의 종 5개를 실리콘으로 복제해 이 중 1개를 주물기법으로 복원했다.
밀랍을 녹여낸 자리에 1200도의 쇳물(구리와 주석 합금)을 붓고 있다.
밀랍을 녹여낸 자리에 1200도의 쇳물(구리와 주석 합금)을 붓고 있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한 후 완성된 범종을 운반하고 있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한 후 완성된 범종을 운반하고 있다.
결과는 참담했다. 신라종의 은은한 소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밀랍주조’ 기법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법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 조선 중기 이후 맥이 끊겨 국내 어느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스스로 비법을 찾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혼자서 종을 만들고 부수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밀랍주조법의 비밀이 종 틀의 주재료인 흙의 성분에 있다는 판단에서 종 틀로 쓸 흙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마침내 신라 수도인 경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문양을 새기거나 미려한 거푸집을 만들기에 좋은 뻘돌(이암·泥巖)을 발견했다. 7년간의 연구 끝에 흙틀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가 재현해낸 전통밀랍주조기술은 범종의 모형을 정교하게 만든 뒤 이를 곱게 빻은 이암 가루에 전분 등을 섞은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싸고, 안의 밀랍을 녹여낸 자리에 1200도의 쇳물 (동과 주석 합금)을 부어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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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어깨 부분에 둘러진 유곽 속에 각각 9개씩 솟아 있는 도들꼭지인 유두 장식.
종의 어깨 부분에 둘러진 유곽 속에 각각 9개씩 솟아 있는 도들꼭지인 유두 장식.
●“은은한 소리 오래가도록 종 밑 울림통 파 놓아” 외길 인생도 맥놀이 같아

그의 공장인 성종사(聖鐘社)의 작업장은 때마침 주문이 들어온 범종을 만드는 작업으로 분주했다. 거푸집에 쏟아지는 펄펄 끊는 쇳물은 빨갛다 못해 샛노랗게 끓어 올랐다. 쇳물을 운반할 용기가 레일을 타고 용해로에 다가가자, 커다란 쇠갈고리로 들어 올려 시뻘건 쇳물을 들이붓는다. 다시 서서히 공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용기 속의 쇳물이 마지막 거처로 옮겨갈 차례다. 거푸집을 해체하고 열흘가량 마무리 잔손질을 하면 비로소 맑고 긴 여운을 지닌 아늑한 ‘신라의 소리’를 제대로 품은 범종이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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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표면의 문양을 디자인하고 있다.
종 표면의 문양을 디자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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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종뉴(종의 고리)의 제작 과정.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종뉴(종의 고리)의 제작 과정.
원 장인은 “은은한 소리가 오래가도록 종 밑에 울림통을 파 놓은 것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 라고 말했다. 종 표면의 아름다운 문양도 최적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는 “표면의 무늬가 종의 좌우를 비대칭으로 만들어 맥놀이를 극대화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달려온 외길 인생은 범종 소리의 맑고 긴 맥놀이에 사로잡힌 세월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종만도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를 비롯해 오대산 상원사 범종, 광주 민주의 종, 충북 천년대종, 싱가포르 복해선원 종 등 7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절이나 지방자치단체에 걸린 이름값 하는 종들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장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범종 서너개가 매달려 있다. 원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나와 종을 친다. 그는 “인간은 기껏 백년을 살지만 종은 천년 이상을 간다”며 “지나온 시간은 천년 전 장인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을 이었다.

종을 치는 그의 손끝에서 식을 줄 모르는 장인의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글 사진 진천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2018-04-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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