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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선거판에 드리운 ‘스트롱맨’ 그림자

동남아 선거판에 드리운 ‘스트롱맨’ 그림자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입력 2018-04-04 23:22
업데이트 2018-04-05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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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빈곤 해결 취약 인식… 반자유주의적 정책 지지 확산”

말레이시아 총선 전·현직 박빙
캄보디아 훈 센 정권 연장 유력
인니·태국 군부 장악 지속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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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은 멀쩡하고 노망이 들지도 않았다. 나는 35년 전에 입던 바지를 그대로 입을 수 있고 여전히 활동적이다. 총리직 수행에 신체적 나이는 상관없다.”

마하티르 모하맛(93)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지난달 2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고령의 나이에 총리직에 재도전하는 자신의 심경을 밝히자 말레이 정치권이 다음달로 예상되는 총선을 앞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말레이 정부는 6일 회기가 만료된 의회 해산 절차를 밟고 총선 날짜를 발표할 예정이다.

나집 라작(65)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여당 연합 국민전선(BN)은 15년 만에 정계에 복귀한 마하티르 전 총리의 재집권 가능성이 가시화되자 “마하티르는 짐바브웨를 37년간 통치하다 퇴출당한 로버트 무가베와 유사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마하티르 총리는 “도둑이 총리직을 맡아 나라를 이끌고 있다”며 현 집권 세력의 부정부패를 끝내겠다고 맞섰다. 전·현직 총리가 정면 대결하는 초유의 상황이지만 둘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말레이시아는 ‘스트롱맨’ 시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말레이시아뿐 아니다. 권위주의적 독재의 그림자가 선거를 앞둔 동남아 주요 국가들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캄보디아와 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고령의 국부’ vs ‘신흥 독재’ 각축

마하티르 전 총리는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이끈 ‘국부’이면서도 수차례 부정선거를 통해 22년 장기 철권통치를 이어 간 독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적들에게 인권 탄압을 자행한 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도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다.

나집 총리는 2009년 마하티르 전 총리의 후원으로 총리 자리에 앉았고 인구의 60% 이상 되는 말레이족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한 이슬람보수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국영투자기업의 자금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계기로 정치적 후원자였던 마하티르 전 총리와 결별했고 사퇴 압박에 시달려 왔다. 나집 정부는 2016년 비자금 스캔들을 강력히 비판한 야당 민주행동당(DAP)의 림관웅 페낭주 수석장관을 체포했다.

지난 3일에는 ‘가짜뉴스’를 유포한 언론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물에 대해서는 6년 이하의 징역이나 50만 링깃(약 1억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가짜뉴스 단속법’을 통과시켜 정부 비판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훈 센은 33년 캄보디아 총리로 군림

오는 7월 29일 하원의원 선거를 앞둔 캄보디아에서는 33년째 권좌를 놓지 않는 ‘현직 스트롱맨’ 훈 센(67) 총리가 향후 5년 동안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다. 캄보디아에서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당이 총리를 배출한다.

훈 센 총리는 국제사회와 인권단체의 우려에도 지난해 제1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 대표에게 반역죄를 적용해 구속하고 CNRP를 해산하는 등 정권 연장에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했다. 이에 따라 지난 2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득표율 96%를 얻으며 58석 전석을 싹쓸이했다.

2014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쁘라윳 짠오차(64) 태국 총리 정부는 당초 올해 11월 민정 이양을 위한 총선을 치르겠다고 공언했으나 지난 2월 27일 총선 시기를 내년 2월로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에 군부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거세지며 정국 혼란이 가중됐다.

쁘라윳 총리의 군부 정권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 4년간 일체의 정치 집회와 정당 활동을 막았던 정치활동 금지 조치를 오는 6월부터 해제한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하지만 이는 민정 이양 이후에도 군부가 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반영한다. 총선이 실시되더라도 이미 태국 군부가 2016년 개헌을 통해 민정 이양 이후 5년간 군부의 지명을 받은 상원의원이 하원의 총리 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군부 세력 재등장 가능성

이 밖에 인도네시아에서는 오는 6월 27일 차기 대권 향배를 가늠할 수 있는 지방선거가 열린다. 내년 대선에서는 ‘친서민’ 대표인 조코 위도도(조코위·56) 현 대통령에 맞서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군부 출신의 프라보워 수비안토(67) 대인도네시아운동당 대표가 도전하고 있다.

독재자였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였던 프라보워는 동티모르 학살 등 당시 군부의 인권침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프라보워 대표는 조코위 정부의 빈곤 개선책이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내세워 군부 세력의 재집권을 꿈꾸고 있다.

토머스 페핀스키 미국 코넬대 교수는 온라인 매체 쿼츠 인터뷰에서 동남아의 권위주의 회귀 움직임에 대해 “민주주의가 가난, 범죄, 종족 갈등,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는 데 약점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반자유주의적 정책이 지지를 얻어 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동남아 지도자들에게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 개선을 비판하거나 요구하는 목소리가 줄어든 것이 ‘스트롱맨 천하’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2018-04-05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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