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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서] 풋잠/황수정 논설위원

[길섶에서] 풋잠/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8-12-09 22:26
업데이트 2018-12-0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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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꽉 찬 통배추가 쪼개진 날에는 온 집안에 풋물이 들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손아귀 저리도록 통배추를 주무르면 풋내가 대문 너머까지 흘러넘쳤다. 배추 밑동에 딴딴하게 칼집을 넣어 종잇장처럼 좍좍 속을 가르던 두 여인은 차력사 같았다. 장독대에 허리만큼 쌓였던 그날의 배춧속보다 더 황홀한 노란색을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하고.

집에서 김장을 담가 먹지 않는 집들이 많아진다. 찝찌름한 군물이 돌수록 더 깊어지는 묵은 김장의 묘미를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 못할지 모른다. 마트에 산처럼 쟁여진 통배추를 보면 물색없이 마음이 뛴다. 두어 포기라도 내 손으로 사들여 시늉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엄마가 떠나고 해마다 기억에서 물러서는 우리 집 김치맛을 김장독 어느 구석에라도 붙들어 앉혀야 하는데.

살뜰한 지인이 텃밭의 농사가 잘됐다며 김장무며 배추 몇 포기를 챙겨 보냈다. 단물 옴팡진 것이 어지간한 사과보다 낫다. 펄펄한 무청에, 시퍼런 배추 겉잎에 풀죽었던 마음이 빳빳해진다.

무청을 데쳐 놓고 풋잠을 청해 볼까. 어쩌면 만날까. 달빛보다 흰 됫박의 왕소금과, 소금물에 숨죽여 자던 장독대의 풋배추와, 속속들이 짠물 들이느라 밤새 자반 뒤집기 했던 엄마의 풋잠을.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2018-12-1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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