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톡톡 다시 읽기] 헤밍웨이 죽음은 자살일까… 문체처럼 하드보일드한 삶

[고전 톡톡 다시 읽기] 헤밍웨이 죽음은 자살일까… 문체처럼 하드보일드한 삶

입력 2010-04-26 00:00
수정 2010-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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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년 7월21일 미국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군인과 종군기자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헤밍웨이의 문체는 여느 작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하드보일드(hard-boiled)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소위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이라 하기엔 건조하다 못해 거칠고, 간결함을 넘어 단조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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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기에 하드보일드 문체는 너무나 적절했다. 예를 들어 ‘노인과 바다’에서는 자연 안에서의 인간을,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86년 작고)의 첫 영화작품인 ‘킬러들’의 원작 ‘살인청부업자’에서는 인간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철저히 파헤친다.

그의 글 안에서는 어떤 동정의 씨앗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을 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의 자연으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 사자가 사슴의 목을 물고 늘어져 숨통을 끊을 수 있듯 인간은 또 다른 인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인간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인간적으로 너무하다 싶은 이야기들을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짓이라며, 인간 그 자체를 고발하려는 듯하다.

이런 글의 성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헤밍웨이의 죽음을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규정짓기도 한다. 아니, 실제로 그는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정말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2일 의문의 엽총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한평생을 인간 본연을 똑바로 응시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던 작가의 죽음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 단정짓는 것은 그리 썩 내키지는 않는다. 사실 그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 수 있는 자는 오직 그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하긴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고야 마는 인간의 이 경이로운 행태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그 큰 고기가 청새치라고 단정짓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한다. 헤밍웨이는 그저 큰 고기라고만 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이마저도 이미 예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노인이 잡아온 거대한 고기의 등뼈를 본 관광객들이 말하지 않던가. “상어의 일종입니다.” 상어는 노인이 그 고기를 잃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적(敵)인데 말이다.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2010-04-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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