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월드컵 기억 거침없는 ‘한방’으로 날려주길

슬픈 월드컵 기억 거침없는 ‘한방’으로 날려주길

입력 2010-06-12 00:00
수정 2010-06-12 01:26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14

90·98년 대표 이상윤의 응원메시지

내게 월드컵은 슬프다. 월드컵 무대를 두 번 밟았다. ‘꿈의 무대’를 누볐지만 월드컵은 언제나 응어리로 남아 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가진 것을 맘껏 보여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스스로 ‘비운의 스타’라는 생각을 할 때도 많다.

이미지 확대
막내로 출전했던 90년 이탈리아월드컵 땐 한 경기도 못 뛰었다. 에이스들만 입는다는 등번호 10번을 겁 없이 달고 벤치만 지켰다. 93년 프로축구 최우수선수(MVP)에 뽑혔지만, 이듬해 미국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TV 중계로 우리 팀을 보면서 가슴이 녹아내렸다. 98년 프랑스에서는 꼭 한을 풀고 싶었다. 그러나 첫 경기 직전 연습경기 때 김태영이 쏜 강슛에 맞아 기절해 버렸다. 이후 컨디션이 꽝이었다. 멕시코·네덜란드·벨기에를 상대하면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태영이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상대 선수들은 너무 위대해 보였다. 나도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였지만, 유럽 빅클럽 선수들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오렌지 군단’에는 기가 질려 버렸다. 주눅들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어느 경기장인지 이름도 모르고 뛰었다. 그만큼 경기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0-5 패배.

이듬해 프랑스 로리앙에서 뛰면서 원정경기를 갔을 때야 ‘익숙한 경기장인데 언제 왔더라. 아, 여기가 네덜란드전을 치렀던 마르세유 스타디움이구나.’라고 알아챌 정도로 당시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씁쓸했다. 4년마다 월드컵이 돌아올 때면 월드컵의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 날 괴롭혔다.

이젠 그늘에서 벗어나 온 마음을 다해 후배들을 응원하고 싶다. 해설을 하면서 ‘공은 둥글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언제든지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 하지만 이번엔 정말 느낌이 온다. 충분히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 우리 선수들이 많이 성장했고 준비도 잘했다. 게다가 그리스나 나이지리아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한창 좋았을 때의 전력에 못 미친다.

우리 후배들은 진화했다. 개인기도 좋고 겁도 없다. 강팀과 만나도 자기 플레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진화의 증거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유럽 빅클럽을 휘젓는 모습은 내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감격스럽다.

마이크를 잡고 축구 해설을 하면서 많이 티냈듯(?) 나는 이청용이 참 좋다. 청용이가 기분 나쁠지는 몰라도, 플레이 스타일이 선수 시절 나와 닮았다. 운동을 그만둔 지금은 살이 붙었지만, 선수 시절 난 약골이라 힘보다는 기술축구를 고집했다. 이청용이 볼턴에서 다른 선수들을 가지고 놀 때 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순진한 얼굴의 그가 대담하게 내달릴 때 난 내가 뛰는 듯 가슴이 뻥 뚫리곤 했다.

축구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어떤 무기를 갖고 어떻게 싸우건 이기는 게 관건이다. 대한민국의 대표로 나간 선수들이 떳떳하게 가진 능력만 보여 준다면 승리는 우리 편이다. 안방에서의 꿈 같았던 월드컵이 끝난 뒤 ‘다시는 월드컵 4강에 못 간다. 운이 좋았다.’는 비아냥이 있다. 그런 시선을 한 방에 불식시킬 수 있는 화끈하고 뜨거운 월드컵이 되길 바란다.

태극전사들, 내 가슴속 월드컵 응어리까지 꼭 풀어 주오~ 파이팅!

●이상윤은 ‘팽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헛다리짚기와 뛰다가 바로 턴하는 기술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당시 보기 드문 기교파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드로 몸놀림이 빨라 상대 측면을 돌파해 결정적인 골을 성공시키는 해결사 역할도 도맡았다. 90, 98년 월드컵대표에 뽑혔다. A매치 29경기에 출전해 12골. 1969년 4월10일생이다.
2010-06-12 4면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남북 2국가론’ 당신의 생각은?
임종석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최근 ‘남북통일을 유보하고 2개 국가를 수용하자’는 내용의 ‘남북 2국가론’을 제안해 정치권과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반헌법적 발상이다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잘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