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듯…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울림

수행하듯…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울림

정서린 기자
정서린 기자
입력 2024-02-20 03:09
수정 2024-02-20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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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 호화 특별전 ‘시대공명’ 새달 17일까지

색과 빛 직조한 장승택 ‘겹의 회화’
손끝서 일렁인 김춘수 ‘울트라마린’
생성과 소멸을 새긴 심문섭 ‘제시’
절제의 美 담은 최명영 ‘평면조건’

원로 작가 4인의 작품 20여점 통해
한국 추상미술 흐름 되짚는 기회로
1.2m 길이의 거대한 평붓을 캔버스에 일자로 내리긋는다. 물감이 다 마르기를 기다린 뒤 다시 내리긋길 수십 차례. 필름을 겹쳐 놓듯 맑고 투명한 색 위에 색이 얹히고 빛이 스며들며 화폭에 겹겹 색의 길이 생겨난다. 수행과 같은 반복적인 붓질로 색의 우연성, 시간의 지층을 쌓아 가는 장승택(65)의 ‘겹의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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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의 회화’
‘겹의 회화’
울트라마린의 바다 위 일렁이는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잔물결)처럼 단숨에 화면에 몰입하게 하는 풍광도 있다. 붓이나 도구를 배제한 채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획을 그리고 지워 나가는 과정이 캔버스에 생동하는 자연의 율동을 만들어 낸다. 청화백자에 슬며시 깃든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몸의 회화’를 이어 가는 김춘수(67)의 ‘울트라마린’ 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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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마린’ 연작
‘울트라마린’ 연작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인 최명영(83), 한국 현대 조각의 흐름을 이끈 조각가에서 회화로 영역을 넓힌 심문섭(81), 김춘수·장승택 등 새로운 해석으로 독창적 추상 세계를 일궈 가는 1~2세대 작가 4인의 작품 20여점이 한데 모였다. 오는 3월 17일까지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 아트스페이스 호화에서 열리는 특별기획전 ‘시대공명’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수행적 과정으로 쌓아 올린 시각적 서사와 이를 다시 갱신하려는 변주의 시도를 통해 한국 추상미술의 유기적인 흐름과 울림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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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회화 연작 ‘제시’
추상회화 연작 ‘제시’
크고 넓은 페인트 붓으로 쓱쓱 그어 내린 궤적에는 파도의 끊임없는 움직임처럼 자연의 생성과 소멸이 가감 없이 새겨져 있다. 물을 탐구해 온 조각가에서 2000년대 초부터는 추상회화 연작 ‘제시’에 몰입해 온 심문섭의 근작들이다.

통영 출신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온 그는 “나의 작품 속에는 물이 흐른다. 나의 중심은 항상 바다에 있다”고 말해 왔다. 바다에서 무한히 생성되는 에너지가 체감되는 회화의 근원을 짚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전시장에는 돌, 철, 흙, 나무 등 자연의 재료를 최대한 변형하지 않으며 자연과 인간의 조응을 추구해 온 그의 조각 작품도 한 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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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조건’ 연작
‘평면조건’ 연작
황색, 검은색, 흰색 등 단조로운 색감의 캔버스 위에 수직과 수평의 획을 거듭 반복하며 평면의 화면에 새로운 공간과 리듬, 사유를 만들어 내는 최명영의 근작들도 나란히 내걸려 시선을 끈다. 그가 1970년대 이후부터 이어 온 ‘평면조건’ 연작은 최대한 절제한 색과 구도하듯 쌓아 올린 물감의 흔적이 돋보이는 작업으로 보는 이들을 ‘명상’에 들게 한다.

이태리 아트스페이스 호화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주요 경향인 단색조 회화부터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 추상미술의 정체성과 흐름을 되짚어 보려는 것”이라며 “네 작가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시간의 중첩, 행위의 반복, 겹겹이 쌓아 올린 층위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깊은 공명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2024-02-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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