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H아파트 경비의 필수덕목 ‘이것’은…

압구정 H아파트 경비의 필수덕목 ‘이것’은…

입력 2013-02-23 00:00
업데이트 2013-02-23 00:0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주차관리가 업무의 80%… 사모님들 외제차 5~10분마다 ‘빼고 박고’

“운전 못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건 주차 실력이라니까요.” 택시기사를 뽑는 게 아니다. 포뮬러원(F1) 드라이버의 호기로운 무용담도, 군 운전병의 각 잡힌 대답도 아니다. ‘원조 강남 노른자’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지키는 나이 지긋한 경비원의 필수 덕목. 바로 운전이다.

이미지 확대


근로기준법상 아파트 경비원은 ‘감시(監視)적 근로자’로 분류된다. 피로가 적고 힘들지 않은 감시 업무를 주로 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 동네에서는 그 정의가 미묘하게 어그러진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은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주차가 80%를 넘는다”고 입을 모았다. 원조 강남인들이 사는 곳으로 꼽히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경비원들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지난 21일 경비원 이동민(57·가명)씨의 24시간을 들여다봤다.

이미지 확대
21일 오전 7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주차장 모습. 블록을 쌓은 듯한 주차장엔 차가 빠져나갈 통로가 없다.
21일 오전 7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주차장 모습. 블록을 쌓은 듯한 주차장엔 차가 빠져나갈 통로가 없다.


이미지 확대
자동차 열쇠가 경비실 초소 벽에 빼곡하다.
자동차 열쇠가 경비실 초소 벽에 빼곡하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40분. 칼바람을 뚫고 이씨가 경비실 초소로 들어왔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며 몸을 녹였다. 하루 중 유일하게 여유를 느끼는 때다.

똑똑똑.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아저씨~ ○○○○번요”라며 정적을 깬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층 사장님’의 개인 기사다. 이씨는 초소 벽에 걸린 차량번호 △△△△ BMW 승용차의 열쇠를 들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간다. ‘주차 전쟁’의 시작이다. 이씨는 ‘○층 사장님’의 에쿠스를 가로막고 있던 BMW를 능숙한 솜씨로 치웠다. 기사는 갇혀 있던 에쿠스를 빼냈고, 이씨는 그 자리에 BMW를 쏙 밀어넣었다.

곧이어 교복 입은 여학생이 다가온다. “아저씨~□□□□번요.” 이씨는 초소로 뛰어가 폭스바겐 키를 낚아챈다. 일렬 주차된 폭스바겐을 치우자 여학생을 태운 벤츠가 미끄러지듯 출발한다. 벤츠가 있던 자리에, 이번에는 폭스바겐이 들어간다. 차들이 빠져나갈 때마다 이씨는 일렬 주차된 차들을 빈자리로 요리조리 옮겼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오래된 명품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이미지 확대


“제가 관리하는 차가 130대가 넘어요. 사실 이 동네에서는 이름만 경비지 사실은 주차 요원이에요. 대충 아무 데나 차를 던져 놓고 가도 우리가 다 가지런히 정리해 줍니다. 출퇴근 시간에 주차하는 게 번잡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아침 8시가 넘어 주차장에 여유 공간이 생길 무렵엔 더욱 바빠진다. 간밤 아파트 밖 노상에 대놓은 주민들의 차를 안쪽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오전 9시부터는 도로의 불법 주정차 단속이 시작되는데 폐쇄회로(CC) TV에라도 찍히면 골치 아프다. 이씨는 허리를 굽혀 길거리에 대놓은 차량의 번호판을 꼼꼼히 살핀다. 9시 전에 출근하는 주민 차량 7대를 빼고 나머지 10대의 번호를 흰 종이에 옮겨 적는다. 초소로 들어가 열쇠 10개를 뽑아 주머니에 챙긴 뒤 아파트 주차장에 안착시킨다.

“딱지라도 떼이면 우리만 힘들어요. 기껏 차 열쇠 맡겨 놨더니 안 옮기고 뭐했냐 그러거든요. 가끔 견인당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진짜 피곤합니다. 시간 없으니까 견인한 걸 직접 찾아오라고 해서 급하게 강남차량보관소까지 다녀온 일도 있다니까요.”

빈 공간이 보이던 주차장은 아침 8시 50분이면 다시 꽉 찬다. 블록 놀이를 하는 듯하다.

출근 시간이 지났지만 끝이 아니다. ‘사모님’들이 집을 나서는 10시 30분까지는 5~10분 단위로 쉼 없이 차를 빼는 일을 반복한다.

이씨가 이곳에 와 처음 배운 것도 주차 관리다. “경비로 처음 오면 일단 6개월에서 1년은 외근(바깥 순찰)을 하면서 차량 종류나 동선 파악하는 일을 배워요. 담당한 동의 차 번호를 싹 외우고, 어떤 차가 몇 시에 나가고 들어오는지도 전부 알아야 돼요. 가끔 비번인 경비를 ‘땜빵’하면서 주차하는 법을 익히고요. 그렇게 1년 정도 훈련한 뒤에 동(棟) 하나씩을 배정해 줘요. 그래도 처음엔 어리버리하고 혼란스럽죠.”

벽걸이에는 번쩍거리는 차 열쇠 120여개가 걸려 있다. 48평형 동에는 절반 이상이, 56평대 동에는 80% 정도가 외제차다. 포르쉐, 람보르기니, 벤츠, BMW, 아우디, 재규어 등까지 모터쇼가 따로 없다. 시동 거는 법부터 사이드미러 펴는 법, 구동 방식까지 전부 제각각이라 이 차를 다뤄야 하는 경비원의 부담은 더 크다. 자동차 열쇠 하나 값이 경비원 월급을 훌쩍 넘는다. “요거 포르쉐는 열쇠 하나가 250만원이에요. BMW 열쇠는 30만원짜리구요. 지난번에 옆동 경비원이 포르쉐 키를 잃어버렸다가 물어 내라고 해서 주인한테 싹싹 빌고 왔잖아요.”

주차 공간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접촉 사고도 잦다. 배상은 전부 경비원 몫이다. “차 주인이 좋은 분이면 그냥 넘어갈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많아요. 나는 700만원까지 물어 봤고, 1000만원을 물어 준 경비원도 여럿 있습니다. 살짝 긁혀도 몇 개월치 월급을 물어 줘야 하지만 시끄럽게 하면 담당라인(동)을 뺏기기 때문에 어디다 하소연도 못 해요.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게 주차 업무인데, 직함상 주차 요원이 아니니까 보험 처리가 안 된다더라구요.”

이게 다 협소한 주차공간 때문이다. 1970년대 고급 민영아파트 바람을 타고 지어진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주차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하주차장은커녕 주변에도 마땅한 공간이 없는 데다 차를 두세 대씩 갖고 있는 주민도 많아 공간은 더욱 비좁기만 하다. 이씨처럼 마음 졸이며 아침저녁으로 운전대를 잡는 현대아파트 경비원은 총 106명에 이른다.

오전 10시 30분에는 배달 도시락으로 이른바 ‘아점’(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다. 뜨거운 물을 마시며 꾸역꾸역 넘긴다. 마침 얄궂게 울리는 인터폰. 이씨는 “아파트 통로의 불이 안 꺼졌다는 전화”라면서 바로 숟가락을 놓고 출동한다. 출근 전쟁이 끝나고 정신을 추스르고 나면 분리수거함 정리, 꽁초 줍기, 눈 쓸기, 불법 전단지 떼기 같은 일반적인 경비원 업무를 한다. 하루에 순찰을 세 차례 이상 돌면서 수상한 사람, 낯선 사람을 걸러 낸다. 경비원마다 할당된 담당 구역이 있는데 그 라인에 도둑이 들거나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고감이다.

한창 눈을 쓸고 있는데 낯선 렉서스 한 대가 들어왔다. 이씨가 달려가 방문 장소를 확인하고 키를 챙긴다. “외부 차량이에요. 우리 주차장에 차를 대는 사람들 키는 무조건 다 받아 놔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차를 못 빼니까요. 외제차는 중립 기어도 안 되는게 많아서 더 갑갑하죠.”

오후 4시. 초소에 엉덩이를 붙일 새도 없이 또 인터폰이 울린다.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갖다 달라는 요청이다. 이씨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세상이 흉흉해서 그런지 여기분들은 택배 배달원이 직접 집으로 갖다 주는 것도 싫어하더라구요. 경비실에 일단 맡기고 제가 갖다 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고기·생선·과일 같은 값비싼 물건일 때가 많지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빡빡한 인사 평가다. 경비원들은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월급에 평가결과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인사고과는 5등급으로 나뉘고 누적 차등적용, 연봉제까지 적용해요. 입사 동기라도 7~8년 지나면 월급이 30만원 가까이 차이 나는 걸요. 혹시 고과에 안 좋게 반영될까봐 자잘한 사고는 쌈짓돈으로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경비원들 목소리도 비슷했다. “우리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요. 관리반장이 계량기를 체크한 일도 있는데, 전기를 표준보다 많이 쓰면 경위서를 써요. 점수 깎일까봐 난로도 제대로 못 켜고 오들오들 떨면서 아낍니다.”(경비원 A씨) “담배도 숨어서 눈치 보며 피우고, 손자 같은 꼬마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해야죠. 동마다 하나씩 있는 지하 화장실 갈 때도 뛰어다닌다니까요.”(경비원 B씨)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역시 ‘생존’ 때문이다. 이씨는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잖아요. 좋든 싫든 정든 직장이고 해고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젊잖아요”라며 입맛을 다셨다.

글 사진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많이 본 뉴스
핵무장 논쟁, 당신의 생각은?
정치권에서 ‘독자 핵무장’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평화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반대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독자 핵무장 찬성
독자 핵무장 반대
사회적 논의 필요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