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만원 세금 안 내려면 200만원만 주세요”…‘국세 소멸시효 브로커’ 활개

“5000만원 세금 안 내려면 200만원만 주세요”…‘국세 소멸시효 브로커’ 활개

장은석 기자
입력 2019-12-22 16:39
수정 2019-12-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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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 소멸시효 브로커 활개
국세 소멸시효 브로커 활개 아이클릭아트 제공
서울에 사는 자영업자 A씨는 최근 전 거래처 사장 B씨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폐업하고 세금 5000만원가량을 체납해 골치를 썩는데 B씨가 “비슷한 처지였다가 벗어났다”며 휴대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A씨가 이 번호로 연락하니 상대방은 “200만원만 주면 해결해 주겠다”고 말했다. A씨가 못 믿자 상대방은 “국세청이 압류한 계좌에 있는 돈을 세금으로 내고 계좌를 해지하면 5년 뒤 세금이 싹 사라진다”며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22일 세무사들과 자영업자들에 따르면 최근 서울을 중심으로 폐업했거나 사정이 어려워 세금을 체납한 자영업자를 타깃으로 한 ‘국세 소멸시효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세무사는 “경기가 나빠 가게 문을 닫은 자영업자가 많은데 동종업계 네트워크를 타고 브로커를 소개받는다”며 “많게는 1억~2억원, 대부분 5000만원 미만 체납자에게 세금을 없애주는 대가로 약 200만원을 요구한다”고 귀띔했다.

브로커의 수법은 국세징수권 소멸시효를 악용하는 방식이다. 세금 5억원 이상이면 납부 기한으로부터 10년, 5억원 미만이면 5년이 지나면 국세청이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다만 국세청이 압류한 재산이 있으면 소멸시효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압류된 재산이 없는 날로부터 5년 또는 10년이 지나야 세금이 사라진다.

브로커들은 체납자 상당수가 압류된 재산이 적다는 점을 노렸다. 서울 여의도의 한 세무사는 “체납액은 수천만원인데 압류 재산은 기껏해야 수백만원의 예금이나 보험인 체납자가 많다”며 “몇백만원만 내면 수천만원의 세금을 안 낼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종 수법인 데다 알음알음 음성적으로 퍼져 국세청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체납징수가 고액 체납자 중심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는 방식이어서 이런 브로커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새로운 편법 세무 컨설팅이라 현재로서는 처벌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재산을 일부러 숨긴 악성 체납자들이 이 수법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리 배우자나 자녀 명의로 재산을 빼돌린 체납자에게는 합법적으로 세금을 안 낼 면죄부가 된다. 한 세무사는 “국세행정 시스템에서 소멸시효가 다 돼가는 체납자를 추려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게 조치할 수 있는데 국세청이 손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세청은 체납액 5000만원 이상 체납자를 지방국세청에서 따로 관리할 수 있지만 행정력의 한계 때문에 고액 체납자부터 조사하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국세청 관계자는 “체납자 대부분은 진짜로 돈이 없어 어려운 사람들인데 이들의 명단을 다 뽑아 소멸시효가 끝나지 못하게 하는 건 정상적인 국세행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멸시효가 납세자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이를 악용해 체납자로부터 돈을 받고, 정부가 정상적으로 징수할 세금까지 못 걷게 만드는 행위는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기용(납세자연합회 명예회장)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악의적으로 소멸시효를 이용해 세금을 안 내는 편법을 쓴 납세자에게는 소멸시효를 중단시키거나 더 연장하도록 세법을 바꿔야 한다”며 “브로커에 대한 처벌을 비롯해 국세행정의 보완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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