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뒤지다가 정말 원하는 만큼 작고 싼 세탁기를 발견했다. 14만원에 설치까지. 무작정 주문했다. 3일째 설치 기사가 소형 세탁기를 들고 방문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주부습진에서 해방되는구나. 뭉게뭉게 꿈을 피우며 설치 기사에게 아양을 떠는데, 세면실 수도꼭지에는 설치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도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수도공사? 수도공사까지? 아이고, 그러면 가외로 10만원이 더 들게 생겼다. 포기했다. 세탁기 돌려보내고, 좀 과장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세탁기와 쌓여 있는 빨래가 번갈아 가며 눈에 어른거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철물점, 수도설비, 싱크대, 전기, 배수 어쩌고 하는 가게들이 네 개나 줄줄이 붙은 데를 발견했다. 무단히 가게마다 들어갔다. 세탁기를 놓으려는데 수도공사를 해줄 수 있는지, 얼마를 받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번듯하고 깔끔하고 있어 보이는 가게 주인들은 다들 시큰둥했다.
신의 도움인가? 마지막에 들른 제일 허름한 가게, ‘철물 샷시 부속 대광사’라고 적힌 가게에서 구세주를 만났다. 둥글고 큰 주먹코에 덧니, 깊은 눈, 팔자 눈썹의 호인이었다. 춥춥하고 어두운 가게에서 동굴곰처럼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구세주께서는 내게 부속품을 사서 직접 설치하라며 실물 수도 파이프로 상세하게 두 번 세 번 설명하셨다. 1만 2000원어치 팔려고 30분도 넘는 설명. 미안했지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자 무작정 해 보라며, 혼자 해 보다가 안 되면 반납하라고까지 하셨다. 설치 기사를 부르면 출장비 기술비 해서 10만원은 받을 텐데 그런 돈 쓰지 말고 직접 해 보라고 웃으며 자꾸 권하셨다.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치법을 알려 주셨다. 1만 2000원어치 부속품을 샀다. 작은 가방에 부속품들을 넣고 서너 시간 헤매고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만취 상태로 서식지에 돌아와 낑낑대며 이른바 대수도공사(?)를 해 보았다. 세면대 아래쪽에 붙은 수도 파이프 나사를 서너 번 풀고 다시 조였다. 흰 비닐 테이프를 감고 나사를 끼워 조이라고 하는 걸 깜박하고 그냥 나사를 조였다가 다시 했다. 물이 새어 나사를 풀고 흰 테이프를 다시 더 감고 다시 또 하고 또 하고, 결국 두어 시간 만에 아, 세면대 아래 새로운 수도꼭지가 생겼다.
설치해 주지 않고 판매만 하는 더 싼 소형 세탁기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고난과 역경의 사흘이 지나고 마침내 소형 세탁기를 제대로 들여놓았다. 온종일 세 번, 재미있는 빨래를 했다. 세탁기 속으로 물이 펑펑 쏟아지며 잘 돌아갔다. 빨래는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됐다.
오래 처박아 둔 옷도 꺼내어 세탁기를 돌려 본다. 잘 돌아간다. 탈수까지 되어 팽팽하고 쫀득해진 빨래들이 나온다. “하하하하, 나 세탁기 있는 남자야.” 이제 세탁기도 있고 하니 속옷을 석 달 열흘 입지 않고 이삼일 정도만 입어야겠다.
하도 기분이 좋아 따스한 음료수 두 병을 사서 구세주 예수님께 갖다 드렸다. 인사를 드리니 대번 알아보시고는 “성공했지요?” 하고 물어보신다. 성공했다고 말씀드리며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드린다. 구세주는 말씀하신다. “그 봐요, 뭐든 하려고 하면 다 되는 거지요.” 가장 허름한 철물점에 내려오신 구세주 예수님은 오늘도 씩씩 웃으시며 ‘조금만 남는 장사’를 하고 계셨다.
2020-09-30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