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남 논설실장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본·외환시장의 빗장을 풀면서 최소한의 합리적 규제 카드를 남겨 놓지 않은 탓이다. 대외의존도는 높고 금융·주식시장은 실력 이상으로 열어젖혀 국제 투기자본을 제어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이제라도 국제 투기자본, 특히 월가(街) 자본의 해악적 들락거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전세계를 휘젓는 국제 투기자본의 총규모는 10조 달러 이상, 하루 거래 규모는 평균 1조 5000억 달러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3000억 달러 수준이다. 또 현재 우리나라 증시 시가총액의 30%는 외국인 자본이다. 리먼사태가 터진 2008~2009년 2월 말 우리나라 증시에서 빠져나간 해외자금은 300억 달러에 이른다. 위기가 닥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방증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토빈세’라는 외환거래세가 투기자본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23일 빌 게이츠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제안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토빈 미국 예일대 교수가 1978년 처음 주장했다. 고정환율제도의 근간인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환율 안정을 위해서는 국경을 넘는 자본에 과세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세금을 매기면 거래 비용이 늘어 핫머니 이동은 줄어 들게 마련이다. 브라질 등에서 주식·채권 거래에 부과하고 있다. 바호주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2014년부터 유럽에 도입하는 방안을 유럽의회에 제출하고, 다음 달 프랑스 칸 G20 정상회의에서도 제안하겠다고 밝혀 더욱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과 영국 등이 내키지 않아 하는 데다 한 나라에서만 도입하면 효과가 없고, 오히려 자본이 급격히 유출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더구나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앞장설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심리적으로 불안하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경제의 더블딥, 유럽발 경제위기의 장기화 조짐 속에 우리 경제도 저성장이 예측돼 외환위기 재발을 막을 합리적 규제 카드는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경상수지 흑자폭이 감소 추세여서 더욱 그렇다. 국회에 계류 중인 선물거래 양도소득세 부과 방안조차도 부산지역 정서를 의식한 의원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처리가 불투명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금융 및 해외투자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라 제조업 및 정보기술(IT)산업 등으로 대외수입을 얻는 나라여서 토빈세가 도입되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영국 등과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전면 도입에 앞서 목표 환율을 벗어났을 때만 과세하는 절충안도 검토할 만하다. 중요한 건 무작정 중·장기 과제로 넘길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라는 점이다.
자본은 냉혹하고 탐욕스럽다. 통제 안 되는 상태로 방임하는 건 위험하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이미 금융·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등 자본의 게걸스러운 속성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obnbkt@seoul.co.kr
2011-10-22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