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비하와 혐오에도…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

숱한 비하와 혐오에도…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

이슬기 기자
입력 2020-05-07 17:50
수정 2020-05-08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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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김봉곤 지음/창비/364쪽/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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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을 출간한 김봉곤 작가. 선배 작가인 최은미 소설가는 추천사에 “‘사랑했었다’와 ‘사랑한다’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몰라하는 사람”이라며 “모르겠어서 일단 쓰는 사람”이라고 썼다. ⓒ김주성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을 출간한 김봉곤 작가. 선배 작가인 최은미 소설가는 추천사에 “‘사랑했었다’와 ‘사랑한다’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몰라하는 사람”이라며 “모르겠어서 일단 쓰는 사람”이라고 썼다.
ⓒ김주성
“덜 사랑하세요”가 대세인 시절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것은 나를 덜 사랑하는 일로 치환되는 시절. 이른바 ‘퍼주는 연애’가 낮은 자존감의 발로로 이해되는 시절.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두 차례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봉곤(35) 작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그런 시류와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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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은 사랑한 시절과 기분에 관한 얘기다. 그러나 그 시절들은 어느 한 계절임과 동시에, 다른 시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영어 시제로 말하면 ‘현재완료’쯤 된다고 해야 하나. 첫 소설집인 ‘여름, 스피드’(2018)가 열렬히 사랑한 특정 시점에 관한 얘기라면 ‘시절과 기분’은 그 시절이 아우르는 스펙트럼에 관한 스토리다.

사랑의 시작은 계절로 치면 항상 초여름이다. 열기에 달떠 그의 땀도, 나의 땀도 달콤하기만 하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사랑하며, 그를 기다리는 일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전술 복습이랄 게 없는 ‘첫사랑’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랑부터는 앞뒤의 사랑이 겹치며 달겨든다. “정말로 딱 한발만 뒷걸음질해서 볼게요”(‘나의 여름 사람에게’ 125쪽)라며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는 창준 같은 이 앞에서 나에게 실패를 안겨줬던 첫 연인을 떠올리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당신을 실-감하고 싶다”(130쪽)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게 김봉곤의 화자들이 가진 주체성이다. 10년 세월을 넘어, 다른 이의 연인이 돼서도 내 곁에 머물렀던 이에게 이별을 고하며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너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더 연인일 때 꼭 말하고 싶어.”(‘마이 리틀 러버’, 261쪽)

김봉곤은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다 게이 커플이다. 책의 앞과 뒤를 장식하는 표제작 ‘시절과 기분’과 ‘그런 생활’은 다른 종류의 사랑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에 있다. 뒤늦게 ‘나’가 쓴 책을 통해 게이였음을 알았을 전 여자친구와 살갑게 조우하긴 해도 극적인 고백은 일어나지 않는다.(‘시절과 기분’) “니 진짜로 그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279쪽)라고 묻는 엄마하고도, 나 몰래 데이팅 앱으로 인스턴트 만남을 계속해 온 애인과도 극적인 화해는 불가하다.(‘그런 생활’) 그러나 그런 생활과 그런 사람, 그런 나를 껴안는 힘이 화자들에게는 있고, 그들 감정의 결을 작가는 세심하게 펼쳐 놓았다. 김봉곤 소설의 힘이다.

작가는 책 말미에 ‘나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잘 안다’로 시작하는 말을 남겨 놓았다. ‘나 그리고 우리’는 퀴어 또는 게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숱한 비하와 혐오와 부정과 번복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다름아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359쪽)라고 썼다. ‘피로’라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윽고 ‘작가의 말’ 마지막은 이렇다.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360쪽) 이른 더위가 밀려온 5월만큼 뜨거운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05-0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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