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로 가는 길
윤정구
사과 속에는 사과나무로 가는 길이 있다
여름 가을 겨울 거쳐 봄으로 가는 사과나무의 길
사과꽃 피는 사월 스무 날이 올 때까지
죽은 나무처럼 조용히 눈비 맞으며 기다리다가
봄이 되면 돌연 연두빛 잎을 틔우고
앵두보다 작은 열매 가슴에 품고
놀기 좋아하는 어린 열매 예쁘다고 달래어
의젓한 사과로 길러내는 사과나무의 길
사과 속 한가운데에
그런 신기한 블랙박스가 들어 있다.
윤정구의 <사과나무로 가는 길>이란 시를 택한 건 “사과 속 한가운데에 / 그런 신기한 블랙박스가 들어있다”는 마지막 구절에 반해서였다. 사과 속 한가운데에 있는 씨앗을 ‘블랙박스’로 본 것이 신통하다. 참신한 상상력을 엿보이게도 했다.
블랙박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행 사고의 원인과 경위 등을 밝히는 데 자료가 될 수 있는 기기다. 사고 당시의 비행고도, 기수의 방위, 엔진상황, 조종사들의 대화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과와 아무 관계없는, 비시적인 과학용어로 시적인 자연현상을 구체화 한 것인데, 시를 읽는 또 다른 재미도 갖게 한다.
‘길’이란 말은 우리에게 늘 익숙하다. 인간의 삶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존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의 소재로 길이 많이 쓰여 온 것도 이 친숙함 때문이다. 만들어진 길은 사람이나 짐승의 왕래를 쉽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과나무로 가는 길’은 그러니까 사과의 생성과정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사과 속 한가운데 있는 신기한 블랙박스, 곧 씨앗에 모두 저장돼 있다는 주장이다. 감미로운 자연 현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사과나무가 자신의 길을 따라 움직여가는 것처럼 기술한 <사과나무로 가는 길>.
잎과 꽃과 열매 등 사과나무의 계절적 변화를 그리는 방법도 섬세하다. 이미지 시의 정통적인 기법을 수행하고 있어 다소 고루하고 상식적이란 인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오히려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 속에는 “사과 꽃 피는 사월 스무날이 올 때까지’”란 구절이 나온다. 왜 하필이면 사과 꽃이 그날 핀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 사별한 큰 누나의 기일이 그날이어서, 흐드러지게 핀 사과 꽃이 늘 아픈 기억으로 떠올라 와서 쓴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예순넷이 된 그는 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 《햇빛의 길을 보았니》와 최근 《쥐똥나무가 좋아졌다》를 낸 바 있다. 그는 또 작년서부터는 시간에 대한 시들을 쓰고 있는데 힘이 닿는 한 거기에 더욱 천착하고 싶다고 했다.
글_ 이유경 편집주간
윤정구
사과 속에는 사과나무로 가는 길이 있다
여름 가을 겨울 거쳐 봄으로 가는 사과나무의 길
사과꽃 피는 사월 스무 날이 올 때까지
죽은 나무처럼 조용히 눈비 맞으며 기다리다가
봄이 되면 돌연 연두빛 잎을 틔우고
앵두보다 작은 열매 가슴에 품고
놀기 좋아하는 어린 열매 예쁘다고 달래어
의젓한 사과로 길러내는 사과나무의 길
사과 속 한가운데에
그런 신기한 블랙박스가 들어 있다.
윤정구의 <사과나무로 가는 길>이란 시를 택한 건 “사과 속 한가운데에 / 그런 신기한 블랙박스가 들어있다”는 마지막 구절에 반해서였다. 사과 속 한가운데에 있는 씨앗을 ‘블랙박스’로 본 것이 신통하다. 참신한 상상력을 엿보이게도 했다.
블랙박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행 사고의 원인과 경위 등을 밝히는 데 자료가 될 수 있는 기기다. 사고 당시의 비행고도, 기수의 방위, 엔진상황, 조종사들의 대화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과와 아무 관계없는, 비시적인 과학용어로 시적인 자연현상을 구체화 한 것인데, 시를 읽는 또 다른 재미도 갖게 한다.
‘길’이란 말은 우리에게 늘 익숙하다. 인간의 삶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존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의 소재로 길이 많이 쓰여 온 것도 이 친숙함 때문이다. 만들어진 길은 사람이나 짐승의 왕래를 쉽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과나무로 가는 길’은 그러니까 사과의 생성과정 이야기인데, 그 과정이 사과 속 한가운데 있는 신기한 블랙박스, 곧 씨앗에 모두 저장돼 있다는 주장이다. 감미로운 자연 현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사과나무가 자신의 길을 따라 움직여가는 것처럼 기술한 <사과나무로 가는 길>.
잎과 꽃과 열매 등 사과나무의 계절적 변화를 그리는 방법도 섬세하다. 이미지 시의 정통적인 기법을 수행하고 있어 다소 고루하고 상식적이란 인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오히려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시 속에는 “사과 꽃 피는 사월 스무날이 올 때까지’”란 구절이 나온다. 왜 하필이면 사과 꽃이 그날 핀다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 사별한 큰 누나의 기일이 그날이어서, 흐드러지게 핀 사과 꽃이 늘 아픈 기억으로 떠올라 와서 쓴 것 같다고 했다.
올해 예순넷이 된 그는 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 《햇빛의 길을 보았니》와 최근 《쥐똥나무가 좋아졌다》를 낸 바 있다. 그는 또 작년서부터는 시간에 대한 시들을 쓰고 있는데 힘이 닿는 한 거기에 더욱 천착하고 싶다고 했다.
글_ 이유경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