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징용 조선인 유골 65년만에 발견

미쓰비시 징용 조선인 유골 65년만에 발견

입력 2010-02-06 00:00
업데이트 2010-02-06 00:46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일본 히로시마의 미쓰비시중공·조선소에 강제 동원됐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던 중 겐카이나다(현해탄)에서 조난당해 ‘불귀의 객’이 된 조선인들의 유골이 65년 만에 처음 확인됐다. 그동안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귀환동포 실종 사건이 정부 차원의 조사에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미지 확대
일본에 강제 동원됐다가 귀국 중 해난사고로 숨진 조선인 징용자 등의 유골 131위가 일본 사이타마현의 사찰 곤조인(承院)에 안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사진은 2005년 추도회 당시 위패들 모습.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제공
일본에 강제 동원됐다가 귀국 중 해난사고로 숨진 조선인 징용자 등의 유골 131위가 일본 사이타마현의 사찰 곤조인(承院)에 안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사진은 2005년 추도회 당시 위패들 모습.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제공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해방을 맞아 1945년 9월 귀국 도중 해난사고로 숨진 징용자를 비롯한 조선인 유골 131위가 일본 사이타마현에 있는 사찰 곤조인(承院)에 안치된 사실을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했다.”고 5일 밝혔다. 1945년 9월17일 오전 10시쯤 후쿠오카 근처의 기타큐슈시 도바타항에서 조선인 246명이 일명 ‘똑딱선’으로 불리는 기범선(機帆船)을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9월15일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지만 배를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에 도바타항으로 건너간 것으로 나타났다. 똑딱선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쓰시마와 이키섬 인근에서 초대형 태풍인 마쿠라자키를 만나 조선인이 모두 실종됐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140만명이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 중 90만명이 1945년 8∼10월에 몰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 이들은 당시 일본이 수송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아 대부분 작고 낡은 배를 탔고, 기상 악화가 겹쳐 해난참사가 잇따랐다. 파도에 떠밀린 이들의 시체는 쓰시마와 이키섬 등 여러 곳에 매장됐다. 당시 미쓰비시공장에는 경기 평택·화성·안성·이천·여주·고양 등에서만 조선 청년 2000여명이 동원됐으며, 해방 당시 공장에는 조선인 2700여명이 남았다.

1976년 이키섬에서 일본 시민단체가 발굴한 유골과 1983년 외무성·후생성이 쓰시마에서 발굴한 유골이 조선인 유골로 파악되기는 했으나 신원미상으로 분류돼 30년 가까이 곤조인에 보관됐다. 정부 차원의 조사는 2005년부터 시작됐고 이번 조사결과 곤조인에 보관된 유골이 각종 해난사고로 숨진 조선인들의 것이며, 이 중에는 ‘미쓰비시 실종 사건’ 희생자들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를 담당한 정영애 조사관은 “해방 전후 귀국 혼란기에 발생한 해난사고 피해는 강제동원 주체인 일본정부와 기업이 안전수송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해당 유골을 강제동원됐다가 숨진 다른 조선인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하는 방안을 일본 정부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2010-02-06 2면
많이 본 뉴스
핵무장 논쟁, 당신의 생각은?
정치권에서 ‘독자 핵무장’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평화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반대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독자 핵무장 찬성
독자 핵무장 반대
사회적 논의 필요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