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3선 시장’ 박원순이 걸어온 길
![2011년 9월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박 시장이 서울 성북구 숭덕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009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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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박 시장이 서울 성북구 숭덕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009.jpg)
2011년 9월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박 시장이 서울 성북구 숭덕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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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은 지난 6일 자청했던 세 번째 임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마이크를 잡자 마자 “임기가 9년이 되다보니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서울시장이 박원순이어서 ‘저 분이 직업이 서울시장인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보냈던 ‘시장의 시간’을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며 답했다. 누구도 그의 임기가 극단적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딸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실종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년 가까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박 시장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박 시장이 2015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에서 단독 회동을 마친 뒤 협의 내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4908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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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실종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년 가까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박 시장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박 시장이 2015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에서 단독 회동을 마친 뒤 협의 내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4908.jpg)
딸에게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실종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10년 가까이 여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박 시장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박 시장이 2015년 5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에서 단독 회동을 마친 뒤 협의 내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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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6일 안철수(오른쪽)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와 박 시장 지지 선언을 한 뒤 포옹하고 있다. 서울신문DB](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4943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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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6일 안철수(오른쪽)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와 박 시장 지지 선언을 한 뒤 포옹하고 있다. 서울신문DB](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4943.jpg)
2011년 9월 6일 안철수(오른쪽) 당시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와 박 시장 지지 선언을 한 뒤 포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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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수상, 2002년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를 함께 설립한 뒤 상임이사를 맡아 사회공헌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선이 예정되자 출마를 선언했다. 9월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지율 5%로 시작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단일화를 이뤄 내 야권 단일후보를 거머쥐었다. 무소속으로 야권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이후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53.4% 대 46.2%로 눌렀다. 2011년 10월 27일, 당시 만 55세의 시민운동가 출신의 원순씨는 ‘서울특별시장’으로 2014년 6·4 지방선거, 2018년 6·13 지방선거까지 집권했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8년 12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마련한 수다공방 패션쇼 무대에 올라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033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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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8년 12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마련한 수다공방 패션쇼 무대에 올라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033.jpg)
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8년 12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마련한 수다공방 패션쇼 무대에 올라 옷 맵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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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과 개발에서는 기존 개발 지상주의를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2012년 2월 개포지구 재건축 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주택의 50%를 소형 평형으로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한강변 아파트의 경우 최대 35층 이상으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403_O2.jpg)
![](https://img.seoul.co.kr//img/upload/2020/07/10/SSI_20200710025403.jpg)
전임자인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오세훈 시장의 광화문광장 등과 같은 ‘한 방’이 없다는 지적에 박 시장은 항상 “그게 정치적으로 맞는지는 몰라도 나는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내 삶을 바꾸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고 맞서 왔다.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직접 발표한 정책은 지난 8일 ‘서울판 그린뉴딜’이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2020-07-10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