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넷 ‘스나이퍼’ “이제 야구 보인다”

서른넷 ‘스나이퍼’ “이제 야구 보인다”

입력 2011-05-13 00:00
수정 2011-05-1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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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 이적·부상 딛고 ‘안타제조기’ 부활

오랫동안 시선은 운동장 구석 가장 어두운 곳에 박혀 있었다. 경기를 보는 눈은 힘을 잃고 침침해졌다. 주변의 소음도 파이팅 소리도 부질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던 시절. 그게 불과 1년 전 일이다. 한화 장성호는 “그때, 몸과 마음이 모두 시들어가던 시기였다.”고 했다. 9년 연속 3할을 기록했던 1급 타자는 2군 무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도 분명치 않은 매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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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2008년이었다. 감독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프로야구 KIA 조범현 감독은 장성호의 느슨한 태도를 못마땅해했다. 잔부상과 컨디션 난조에 시달리던 장성호는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몇번 둘의 엇갈림이 있었다. 장성호는 “이상할 정도로 오해와 불신이 쌓이고 얽혔다.”고 했다. 이듬해부터 장성호는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됐다. 포지션이던 1루엔 최희섭이 중용됐다. 장성호는 내·외야를 전전하는 대타요원으로 전락했다. 2009시즌 한국시리즈 우승 때도 어색한 표정으로 운동장 구석에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FA 신청을 했다. “절대 돈 때문이 아니었다.”고 했다. 떠나야 했다. KIA에선 더 이상 야구인생의 미래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하는 팀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KIA에 남았지만 지난해 한화로 이적하기까지 줄곧 2군에서 지냈다. 장성호는 “은퇴를 고민했었다. 다만 너무 쓸쓸한 마무리라는 생각에 선뜻 결정을 못했다. 그래도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화 이적 후에도 좋진 않았다. 그동안 훈련이 너무 모자랐다. 마음고생은 몸과 타격 밸런스도 함께 망가뜨렸다. 지난해 한화에서 74경기에 나와 타율 .245에 4홈런 29타점에 그쳤다. 장성호는 “제대로 내 스윙을 돌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감각을 찾기 힘들었다.”고 했다. 대충 때려도 3할은 친다던 장성호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시즌 종료 뒤엔 오른쪽 어깨 수술까지 받았다. 30대 중반 나이. 짧지 않은 공백. 수술 경력. 여러 불안요소가 겹쳤다. 만약, 올 시즌에도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이대로 야구인생이 끝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분발이 필요했다.

장성호는 “지난겨울,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몸을 만들었다.”고 했다. 재활 기간 낮엔 산에 오르고 밤엔 마사지를 받는 일정을 반복했다. 하와이 전지훈련엔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 투수들의 공과 패턴을 잘게 쪼개 분석했다. 상대 머릿속에 들어앉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지난달 24일, 1군 무대에 복귀했다. 복귀 이후 페이스가 좋다. 타율 .296. 홈런 3개를 기록 중이다. 거의 매 경기 안타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 11일 LG전에선 9회 초 역전 2점 홈런을 때렸다. 스나이퍼라는 별명대로다. 타깃 하나를 정해놓고 숨죽여 기다린다. 목표하던 공이 사정권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넘긴다. 장성호는 “노림수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이제… 야구가 조금 보이려고 한다.”고 했다. 34세 장성호의 야구인생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2011-05-13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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