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굴포천 대홍수 아라뱃길 구상 ‘시발점’
착공에서 완공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인아라뱃길’이 마침내 25일 정식 개통된다. 1991년 정부가 경인운하 건설을 공식화하면서 시작된 아라뱃길 공사는 20년의 우여곡절 끝에 완공, 인천∼서울간 최초의 뱃길을 열었다.◇아라뱃길 건설의 시발점 = 인천시 부평구와 경기도 부천ㆍ김포시에 이르는 굴포천 유역은 매년 여름 우기때면 상습침수로 주민피해가 반복됐다. 16명의 사망자와 5천400여명의 이재민을 낸 1987년의 대홍수는 경인운하 사업 추진의 촉매제가 됐다.
한강 수위보다 낮아 여름철 장마로 매년 최대 1천억원의 홍수피해가 발생하자 부천시는 1987년 굴포천의 수로를 인천 앞바다로 연결하는 운하 건설을 건의했고, 건교부는 2년 후인 1989년 6월 운하건설계획을 확정했다.
1991년 1월 정부는 “서울과 인천을 뱃길로 잇는 경인운하 건설공사를 하반기에 착공, 오는 1995년에 완공한다”고 발표했다. 운하 건설이 경제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정부는 타당성 조사를 거쳐 같은해 11월 공사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사업 규모도 현재의 아라뱃길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총 사업비 2천967억원. 구간거리는 20.5㎞(행주대교∼인천 계양ㆍ백석동)로 굴포천 준설(4.2㎞)과 나머지 16.3km는 김포평야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뚫는 방법으로 건설키로 했다.
폭은 110m, 깊이는 3m로 계획됐고 바닷물의 역류를 막기 위해 폭 26m, 길이 193m의 갑문 2개와 폭 20m의 배수문도 설치하기로 했다.
지역 개발은 물론 굴포천 유역의 상습침수와 부족한 인천항만 시설, 경인고속도로 교통체증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다목적 카드였다.
◇20년간의 갈등과 시련 = 지난 1999년 8월에는 경인운하 건설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이 무더기로 이탈했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들의 연이은 반대에 이어 여ㆍ야 모두가 국회에서 ‘재검토’와 ‘전면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2003년 1월 당시 대통령인수위의 경인운하 정책 재검토 주문에 이어 30여개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경인운하 건설사업 백지화를 위한 수도권 시민공동대책위’는 환경의 세기에 걸맞은 대규모 국책사업의 선정에 대한 새로운 절차가 입안돼야 할 것이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감사원 감사에서는 경제성 평가가 왜곡됐다는 결과가 나와 사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정부는 2004년 경인운하 민간사업자와의 실시협약을 해지한 뒤 방수로 공사만 진행했다.
2004∼2008년 여ㆍ야 국회의원들이 KDI의 경인운하 경제성 평가에 대한 부실 용역과 환경오염 등을 내세워 ‘대운하 건설 백지화’를 촉구하면서 경인운하 사업은 사실상 물건너 가는 듯 했다.
그러나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운하사업이 급속도로 재추진됐다.
◇시민들, 기대반 우려반= 아라뱃길 인근 주민들은 아라뱃길 개통에 따른 교통체증과 사고의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다.
서구에 사는 최준석(53)씨는 “아라뱃길 수로를 남북으로 잇는 교량이 들어서면서 도로체계가 변하고 교통위험이 가중돼 주민불편이 크다”며 “특히 교량마다 경사가 급해 겨울철 사고피해가 우려된다”고 했다.
반면 아라뱃길 옆 아라자전거길(왕복 36㎞)을 이용했다는 한 시민은 “비록 단조롭기는 하지만 그나마 자전거 이용자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며 “쉬어갈 수 있는 매점과 벤치 등의 친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좋다”고 말했다.
”운하 수변의 관광ㆍ레저공간 조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 “핑크빛 전망과 달리 아라뱃길의 실제 경제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우려와 기대의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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