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1등 지상주의/노주석 논설위원

[씨줄날줄]1등 지상주의/노주석 논설위원

입력 2010-02-16 00:00
수정 2010-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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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개봉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한국영화는 입시에 찌들어 꿈을 잃고 방황하던 당대 학생들의 자화상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이미연과 김보성이 데뷔한 이 영화는 1등을 놓치지 않던 한 여학생이 한순간의 연애사건으로 성적이 떨어지자 투신자살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줄거리였다. 영화제목은 지금도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을 대변하는 관용구로 쓰이고 있다.

요즘 인기 절정의 드라마 ‘공부의 신’은 공부 못하는 꼴찌들에게도 인생역전의 기회를 주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방송국 측은 설명한다. 그러나 공영방송에서 노골적으로 1등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만화가 미타 노리후사의 만화 ‘꼴찌, 도쿄대 가다’를 원작으로 일본 TBS에서 2005년 방영한 작품의 리바이벌이다. 방영 당시 도쿄대 지원자가 12%나 늘어나는 반향을 일으켰다. 1등주의 비판에 대해 원작자는 “합격 여부보다 노력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며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작품을 옹호했다. 실제 드라마를 보는 아이들은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착하는 게 현실이지만.

글로벌 1위 자동차기업 도요타의 사상 최대 리콜사태와 관련, 현대경제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원인은 1인자의 자만심이었다. 도요타식 혁신을 강조하는 CEO로 유명한 김쌍수 한전 사장은 “혁신보다는 자만이 문제였다. 1등이라고 자만할 때 문제가 생긴다.”라고 분석했다. ‘영원한 1위는 없다.’라는 평범한 진리의 재확인이라고나 할까.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나서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앉아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선을 지켜봤다. 우리 선수 중 한 명이 금메달을 딴 건 좋았지만 차마 못 볼 장면을 보고 말았다. 메달 욕심에 자리다툼을 한 우리 선수 2명의 충돌은 예선경기 내내 선수들 칭찬을 아끼지 않던 어른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어부지리로 은메달을 목에 건 더티플레이의 대명사 오노가 얄미웠지만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급기야 일부에서는 국내 쇼트트랙 파벌의 역사까지 들먹거린다. 인터넷에는 특정 선수의 이름을 지칭하면서 비난하는 글이 떠돌고 있다. 한국체육대학 출신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다는 말인가. 어찌 어린 선수들을 탓하랴. 이 모든 것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은메달 따면 고개 숙이고 우는 세상을 만든 우리 어른들의 잘못인 것을.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2010-02-1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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