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談餘談] 칼자국/김민희 경제부 기자

[女談餘談] 칼자국/김민희 경제부 기자

입력 2010-05-08 00:00
업데이트 2010-05-0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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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런 식이다. 나는 억세게 운이 없다. 석 달 만에 칼럼 쓸 차례가 돌아왔는데 하필이면 어버이날이라니. 어버이날에 어버이 얘기를 하자니 하품나게 진부하고, 안 하고 넘어가자니 찜찜하다. 마치 가진 패를 다 보여주고 치는 화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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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체육부 기자
김민희 체육부 기자
죽어도 시시하긴 싫었다. 머리를 꽁꽁 싸매고 다른 화젯거리를 떠올려 봤다. 명색이 경제부 기자니까 치솟는 환율에 대해 얘기해 볼까, 산들바람 부는 봄이니 연애 얘기를 해볼까. 다른 주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에선 어버이날이란 네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라고 얘기하면 코끼리만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어쩔 수 없이 더듬었다. 엄마와 나의 관계를. 세상의 모든 모녀가 그렇듯 우리도 무수히 많은 애증(愛憎) 쌍곡선을 그리며 살아왔다. 엄마라는 말은 내게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떨 땐 못난 딸 둘만 바라보고 억척같이 살아온 육십년 세월이 안쓰러워 가슴이 아리다가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옹고집과 억지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가, 같이 쇼핑을 나가 깔깔거리며 옷을 고를 땐 제일 친한 친구 같기도 하다. 인생에서는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엄마와 딸 사이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어 왔다.

그런데 김애란의 소설 ‘칼자국’을 읽고 그 생각이 바뀌었다. 얄밉게도 그녀는 내가 콕 집어내지 못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렸다. 글쓰기로 밥벌이하는 주제에 남의 글로 지면을 메우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여기에 그녀의 문장을 내놓는다. 나는 절대 내 입으로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 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haru@seoul.co.kr
2010-05-0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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