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CEO리더십 연구소장
옴부즈맨(ombudsman)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자. 옴부즈맨은 스웨덴어로 ‘대리자·후견인·대표자’를 뜻하고,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민정관(民情官)·호민관(護民官)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옴부즈맨 제도는 행정부에선 정부의 독주를 막기 위한 일종의 행정 감찰관제도였다. 행정기관에 의해 침해받는 각종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신속·공정하게 조사·처리해 주는 보충적 국민권리 구제제도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독자와 시청자의 불평불만을 조사하고 오보 여부를 밝혀내는 것으로 운영된다.
거슬러 올라가 올 상반기에 옴부즈맨 칼럼에서 지적되었던 몇 가지 주요 제안에 대해 살펴보자. ‘생활 이슈를 찾아내는 눈’(5월 16일 자)에선 “일반인의 처지에서 신문의 효용성은 거창한 정책 비판이나 복잡한 이슈 탐사와 같이 부담이 느껴지는 ‘감시’나 ‘고발’보다는 내 생활 속 문제들을 다시 한번 살펴봐 주고 해법을 찾아 주는 생활형 기사들이 훨씬 크게 느껴진다.”라며 생활형 옴부즈맨 스타일 기사의 확대 바람을 표한 바 있다. ‘중국과 관련한 다양한 시각의 필요성’(5월 9일 자)에선 ‘뉴스프레임 효과’는 사건의 특정 측면을 강조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재현되는 현실을 확대하거나 축소할 수 있고 호의적으로 보이거나 비호의적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 후, 중국 관련 기사의 편향적 시각 탈피를 주문하고 있다. ‘언론사 파업을 바라보는 신문의 시선’(3월 28일 자)에선 “신문은 방송언론의 파업사태에 대해 심층적인 보도로 파업의 의미를 제대로 알릴 것”을 주문하고, “국내 주요 언론사들이 무슨 이유로 파업하고 있으며, 이들이 방송스튜디오가 아닌 거리에서 마이크가 아닌 깃발을 들고 무엇을 부르짖고 있는지 신문이 바라보는 시각을 표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좋은 제안과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처럼 ‘넘치는 제안’들이 얼마나 지면에 반영됐는지 궁금하다. 이런 지적이 있은 후에 생활기사가 지면에서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 같지 않다. 사상초유의 장기파업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방송사 파업 원인과 영향에 대한 심층기사를 보지 못했다. 또한, 중국의 인권변호사 천광청(陳光誠)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시각의 분석과 조망 기사가 더 늘어나지도 않았다.
신문사 외부 필진인 옴부즈맨들의 ‘이상주의적 시각’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안과 바람’에 대한 견해, 지면에 반영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피드백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조직 커뮤니케이션에서 필요한 것은 소통의 멍석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피드백이다. 의견 개진만 있고, 반응과 변화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의욕과 참여도는 떨어진다. 메아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올해 나온 이야기와 작년에 나온 이야기의 중복건수는 혁신지수와 반비례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작년 제안건수가 재탕 삼탕된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는 없이 오로지 ‘NATO’(No Action Talk Only)만 되풀이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옴부즈맨 칼럼의 제안이 얼마나 반영되는지 한번 검증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리라 생각된다. 옴부즈맨 칼럼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려면 적어도 분기 내지는 6개월 단위로라도 본란에서 지적된 여러 가지 사안을 정리하고, 지면 반영 의지와 변화를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 이유를 지면에 밝히는 것도 방법이다. 변화가 어려운 것은 아이디어나 제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행력이 부족해서다.
2012-05-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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