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승 심의실장
부쩍 ‘역전세’니, ‘깡통 전세’니 하는 말들이 많이 들린다. 지금 언론이 쓰는 역전세는 전셋값이 계약 당시보다 하락하면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듯하다. 매매값이 전세가격보다 더 떨어져 집을 팔아도 전세보증금을 내줄 수 없는 깡통 전세와도 헛갈리게 쓰고 있다. 본디 역전세의 사전적 의미는 전세 물량이 늘어난 데 반해 전세를 살려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컬었다.
역전세난을 걱정하는 이들은 전셋값 하락의 부작용으로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정부가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전세난을 우려할 정도로 집값이나 전셋값이 그리 많이 떨어진 것일까. 현재 상황에서 역전세란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정부가 책임지라’는 집주인들의 요구가 과연 타당한지, 이를 앞장서 설파하는 일부 부동산업자나 부동산 전문가들의 진단이 과연 맞는지는 한 번쯤 따져 볼 문제다.
한 달 전 기준으로 볼 때 전국적으로 전셋값이 하락세인 것은 맞지만, 이 하락세는 지방이 이끈 것이고, 서울 전셋값은 2년 전보다 아직도 조금 높다는 게 한국감정원의 통계치다. 송파·서초를 포함한 강남 4구의 전셋값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하락률(-0.82%)이 전국 평균(-2.67%)에 비하면 아직까지 큰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전셋값이 하락한 강남 일부 고가 아파트를 예로 들어 ‘역전세난’이라고 일반화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도 보합세나 이제 막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지난 5년간의 상승폭에 견줘 보면 최근 2개월의 하락폭은 하락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 같다. 지난 5년에 걸친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은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 줬던가. 양극화와 내수 위축의 주범이었고, 가계부채를 크게 끌어올렸으며, 저출산을 부채질하지 않았던가. 서울 아파트 가격 하락세는 이제 시작일 뿐인데도 벌써부터 집값과 전세값이 크게 떨어졌다며 호들갑 떠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다. 그 뜻이 그다지 순수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집값 하락을 어떡하든 막아 보려는 특정 기득권층의 몸부림이 엿보이는 까닭이다.
역전세난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역전세 대안으로 정부가 집주인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줘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을 내놓은 것은 좀체 납득하기 어렵다. 집값 안정화 정책으로 전세가격이 떨어지면서 2년 전에 계약했던 전세금을 내줄 수 없으므로 이를 정부가 벌충하라는 요구인 셈인데 이게 가당한 말인가.
집주인은 계약이 해지될 때 전세보증금을 준비해 돌려줄 의무가 엄연하거늘 그걸 못 하겠다고 버티는 것은 심각한 모럴해저드다. 더욱이 전세금 못 내주겠다는 집주인들 중에는 전세 끼고 집을 산 이른바 ‘갭투자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갭투자로 집을 사 재미 본 사람이라면 집 팔아서 전세금 돌려주는 게 상식이다. 전세금 올려 달라고 할 때마다 고금리 대출을 받았던 세입자들 아니었던가. 리스크를 그런 세입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몹시 정의롭지 못하다. 집주인에게는 전세보증금을 잘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집주인들의 투기성 투자 때문에 서민들이 눈물 짓는 일이 더는 없어야겠다. 지난 세월 전셋값 폭등 때 얼마나 많은 서민이 등이 휘고 남 몰래 눈물을 흘렸는지를 돌이켜봐야 할 일이다.
정부가 역전세 문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굳이 정부가 나서야 한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전세금을 갚도록 유도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야박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투자해서 손실 보는 것은 전적으로 집주인 개인의 책임이다. 주식에 투자해 손실이 생겼다고 정부가 보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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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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