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저무는 황혼/서정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저무는 황혼/서정주

입력 2022-10-06 20:08
업데이트 2022-10-07 02:2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저무는 황혼/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나는 없느니.

소태깥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봇도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 두고,

으스스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슥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

황혼이 많다. 저 해남쯤이던가? 천지에 가득한 그 속으로 빠르게 달려 본 적 있다. 처음에는 참으로 황홀하다가도 다 스러진 어둔 시간 속에 닿으면 한없는 쓸쓸함이 온다. 더구나 내 삶이 이제 여기에 닿았구나 생각하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살아온 내력까지 보게 된다. ‘저승에 갈 노자도’ 없는 삶이었다니.

하루를 다 살고 황혼을 맞는다. 밤이 오고 잠을 청한다. 또 하루가 고단했건만 잠으로 건너가기는 달콤하지만은 않다. 딸네 집에 가는 심정이라니. 내키지는 않으나 가긴 가야 하는 사정이 있어 그리로 간다. 가문 자리의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봇도랑물’의 사랑마저 제대로 해보지 못한 청춘의 일까지도 이제야 맘껏 흐르라고 ‘내버려 둔’들 무슨 소용인가.

‘산 그리메’ 아래 눕는다. 산 아래 허드레 무덤 자리다. 그 자리에 ‘엇비슥이 비끼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남은 생은 어떠해야 하느냐…. 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황혼’은 커다란 인생론의 문장으로 펼쳐져 있다.

장석남 시인
2022-10-07 26면
많이 본 뉴스
최저임금 차등 적용, 당신의 생각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심의가 5월 21일 시작된 가운데 경영계와 노동계의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최대 화두는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 적용’입니다. 경영계는 일부 업종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요구한 반면, 노동계는 차별을 조장하는 행위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찬성
반대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