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 선진국/우석대 명예교수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번역 선진국/우석대 명예교수

입력 2022-08-02 20:26
수정 2022-08-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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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2012. 우리도 번역의 꽃을 정성껏 피워 보자.
대전 2012. 우리도 번역의 꽃을 정성껏 피워 보자.
“번역, 그것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빛을 들이는 것이요, 껍데기를 깨고 알맹이를 먹게 하는 일이요, 장막을 걷고 가장 성스러운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요, 우물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이다.” 영어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1611년판 ‘제임스 왕 성경’(King James Bible)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번역 성경이지만 그 자체로서 영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으로 꼽힌다. 루터는 성경을 활기찬 구어체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독일의 문화적 민족주의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16세기까지 독일인은 다른 지방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역별로 언어의 차이가 심했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의해 널리 보급된 독일어가 그 후 곧 독일 전역에서 표준어가 됐다. 루터는 세계사에서는 종교개혁자일지 모르나 독일인에게는 민족 영웅이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1790)은 ‘보수주의의 경전’으로 불리지만 광복 이후 60여년간 번역되지 않았다. 비유컨대 한국의 ‘보수’는 ‘한글 성경 없는 기독교’와도 같았다. 2009년 처음으로 이 책이 번역됐는데, 번역자는 ‘진보’ 성향 역사학자다. 이를테면 불교 승려가 기독교 성경을 번역한 셈이라고나 할까.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81년에 번역했다. 우리와는 무려 128년 격차다. ‘보수’의 무능과 게으름을 보여 준다.

번역자의 손길을 거치지 않을 경우 수많은 외국 서적들은 (극소수 전문가를 제외한) 일반 독서 대중에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번역자에게 제공하는 노동의 대가는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다. 일본과 비교해도 천양지차다. 한국의 번역자는 마치 ‘월간지’를 찍듯이 1년에 10권 이상의 번역서를 출간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곤란할 지경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다. 지금 생산되는 번역물이 젊은 세대를 양육하기에 충분한지 고민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후대에 대한 책임이다. 번역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2022-08-0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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