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살얼음 승부, 한 표의 무게/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살얼음 승부, 한 표의 무게/육철수 논설위원

입력 2012-12-19 00:00
수정 2012-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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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11월 7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미 대선 사상 가장 치열했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는 플로리다 주의 개표 상황을 두고 한달 넘게 논란에 휩싸였다. 개표원들은 큼지막한 돋보기를 들이대며 수차례 검표를 했고 연방대법원 판결까지 간 끝에 당선자가 가려졌다. 미국은 알다시피 유권자가 선출한 선거인단에 의한 선거다. 한 주에서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이긴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간다. 선거 이튿날 새벽, TV방송은 플로리다에서 간발의 차로 앞선 부시를 승자로 선언했으나 2시간도 채 안돼 취소했다. 고어는 부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가 거둬들였다. 아침까지 고어는 선거인단 260명을 확보해 246명을 얻은 부시를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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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철수 논설위원
육철수 논설위원
관건은 선거인단 25명이 걸린 플로리다 주였다. 이곳은 유권자가 600만여명. 개표 결과 부시가 327표 더 많았다. 하지만 고어 측의 이의제기로 수작업 재검표가 이루어졌다. 1차 검표에서 표차는 537표로 더 벌어졌다. 2차 검표에서도 부시가 930표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혼란이 거듭되자 연방대법원은 검표를 중단했다. 이어 소집된 선거인단 표결에서 부시는 271대 260으로 승리했다. 투표일 이후 무려 한달 열흘 만에 결판이 났다.

930표 차이면 플로리다 유권자의 0.017%가 미국 대통령의 당락을 결정지은 셈이다. 집계가 오락가락한 것은 천공(穿孔) 투표용지가 문제투성이였던 탓이다. 어쨌거나 당시 선거는 박빙 승부에서 표의 중요성과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깨끗한 승복’도 역사에 남을 만하다. 고어는 전국 총득표에서 33만 8000표를 더 얻었다. 하지만 선거제도에 막혔다. 그는 연방대법원의 검표 중단 판결도 받아들여 미국이 안정을 되찾게 했다.

오늘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지금 상황은 진보·보수 진영이 서로 똘똘 뭉쳐있어 예측 불허다. 2000년 미국 대선처럼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투표율에 따라 특정 후보의 유불리가 거론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유권자들에겐 무거운 책무가 떨어졌다. 살얼음 승부에서 ‘한 표’의 가치와 힘은 보통 때에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보·혁 구도’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인물·이념·정책 등에서 어느 쪽인지 분간이 안 가는 대목이 많다. 이런 요소가 정책이나 인물을 꼼꼼히 따져 투표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유권자에게 이성·논리적으로 판단하라는 조언은 그래서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투표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투표를 이념·지역·세대·계층·성별 등에 따라 해도 그게 ‘솔직한 민심’일 것이다. 이성·논리 운운하는 것보다 이런 투표가 오히려 나라를 이끄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새 대통령이 표심을 읽고 지역감정은 어느 정도고, 세대 갈등은 어떠하며, 이념의 분포는 어떤지 제대로 알아야 포용을 하든 화합을 하든 할 게 아닌가. 그러자면 투표로 민심을 정확히 알리는 게 최선이다. 마뜩잖은 대통령과 5년을 보내기 싫으면 더더욱 투표장을 찾을 이유가 되지 않겠나.

더구나 이번처럼 접전에서는 극소수 투표자들에 의해 나라의 명운이 갈릴 수 있다. 공휴일궤(功虧一)라 했듯, 태산을 쌓는 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다 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한 표가 아쉬운 지지 후보에게 ‘한 줌 흙을 보태는’ 심정으로 아낌없이 표를 주면 좋겠다. 투표율이 높아야 새 대통령에게 힘이 생기고, 국민에게 더 관심을 가지며 더 겸허해질 것이다. 나라의 진정한 주인임을 보여주는 오늘, 소중한 한 표를 ‘시대교체’든 ’정권교체’든 국가대사에 가치 있게 써 보자. 투표율이 높기를 바라면서도 지지세력의 양분에 따른 선거 후유증이 벌써 걱정된다.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성숙한 민주주의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혼탁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일은 새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ycs@seoul.co.kr

2012-12-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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