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금관총 발굴 혹은 도굴/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금관총 발굴 혹은 도굴/서동철 논설위원

입력 2015-01-23 00:32
수정 2015-01-23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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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금관총과 이사지왕’이라는 전시를 볼 수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같은 이름의 전시를 경주박물관의 신라역사관 2층 로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서울에서 ‘테마전’이라고 했던 것을 ‘특집진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금관, 관모, 관꾸미개, 금허리띠를 비롯해 90점 남짓한 금관총의 대표 유물이 망라됐다.

앞서 중앙박물관은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큰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을 발견했다. 또 다른 큰칼에서도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八’(팔), ‘十’(십), ‘?’(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이사지왕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금관총을 다시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경주박물관 전시에도 당연히 이 칼들이 출품됐다.

수준에 관계없이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고고학 조사 방법이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다. 일본인들은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경주의 신라 무덤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1909년 144호분, 1915년에는 100호분을 조사했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신라 특유의 매장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무덤을 덮은 흙에서 철검과 철모, 그리고 약간의 토기를 수습하는 데 그쳤다. 100호분을 검총(劍塚)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신라 무덤의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 바로 금관총이다. 1924년 가을 경주 노서동에서 가정집을 늘려 지으려고 뒤뜰을 파헤치다가 유물을 발견해 일본 순사에게 신고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박물관 직원의 파견이 늦어지자 일본인 경찰서장과 보통학교 교장 같은 이들이 진두지휘해 유물을 거둬들였다. 이 무덤을 금관총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시 최초의 신라 금관을 수습했기 때문이다.

발굴 보고서를 낸다고 했지만 유물의 위치부터 기억에 의존해야 했으니 정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적지 않은 유물이 빼돌려졌다. 금제 장식을 비롯한 유물 8점은 이른바 ‘오쿠라 컬렉션’에 들어가 지금은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넘어갔다. 귀중한 유물의 존재를 확인하자 일제는 1924년 금령총·식리총·옥포총에 이어 1926년 서봉총을 발굴한다. 고고학의 이름을 앞세우고 학자들이 참여했지만, 여전히 발굴인지, 도굴인지 모를 수준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신라 무덤 5기를 다시 발굴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올해 금관총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서봉총, 금령총, 식리총, 황남리 고분을 재발굴한다는 계획이다. 남겨 놓은 기록이 너무 부실해 신라고분 연구를 위해서는 재발굴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첫 발굴 당시 유물 수습에 급급해 무덤의 일부분만 조사한 만큼 새로운 유물의 발굴도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쌓아 올린 한국 고고학의 역량을 쏟아부어 신라 고분이 새롭게 주목받는 성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5-01-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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