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덕수궁 돌담길/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덕수궁 돌담길/서동철 논설위원

서동철 기자
입력 2015-02-25 18:02
수정 2015-02-2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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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 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쌓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 데다가 좌우편 담 안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마치 자연의 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의 한 토막이다. 영성문 언덕길이란 서울 신문로에서 덕수초등학교를 거쳐 미국대사관저로 이어지는 고갯길을 말한다.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후문 역할을 했던 영성문(永成門)은 1920년 헐렸다. 고갯마루에서 덕수궁 담장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 너머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을 덕수궁 돌담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이 오래전부터 낭만의 거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격동의 근대사가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버리자 피란지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로 쓰면서 궁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즉위했다. 같은 해 창덕궁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행궁을 떠나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200년 넘게 창덕궁과 경복궁에 정궁(正宮) 역할을 맡김에 따라 경운궁은 잊혀진 궁궐이 됐다. 넓었던 경운궁의 영역도 상당 부분 잠식됐다.

옛 정릉동, 곧 정동은 19세기 후반 구미 공관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른다. 가장 먼저 공관을 개설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루시우스 푸트 초대 미국공사가 1883년 민씨 일가의 기와집을 사들인 것이다. 이후 영국공사관이 1884년, 러시아공사관이 1885년, 프랑스공사관이 1889년, 독일영사관이 1891년, 벨기에영사관이 1901년 자리 잡는다.

경운궁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스포트라이트틀 받는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공세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담장을 새로 쌓는 등 궁궐의 모습을 다시 갖추었다. 고종은 이듬해 대한제국을 열지만 1907년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德壽)로 정해지면서 태황제의 거처는 덕수궁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에도 덕수궁의 담장은 1960년대까지도 남쪽을 제외하고는 움츠러들기만 했다.

서울시가 덕수궁 돌담길을 완성하는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한말 영국공사관이 들어서며 막힌 둘레길을 잇기로 영국대사관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온전한 덕수궁 돌담길을 다시 걸으며 한말의 역사를 생각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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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5-02-2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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