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경희 광운대 미디어영상학 교수
전화연결이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들었다, 전화가 켜져 있는 줄 모르고 비밀대화를 중계했다, ‘알 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보여 섬뜩했다, 단순히 순간의 감정을 표현했던 트위터 내용이 나중에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증거물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위치를 추적당하고 있었다 등등의 경험담이 줄을 이었습니다. 결국 우린 모두 잠시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인 ‘삐삐’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연락이 쉽지 않아 약속이 어긋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워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도 신중하게 하고 그렇게 만난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이 소중했겠지요. 삐삐시대는 그런 급한 일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조금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삐삐를 받고 공중전화를 찾아 뛰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책임지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이제 우린 약속을 좀더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번개라는 이름으로 약속이 급조되기도 하고 ‘급하고’, ‘중차대한’ 다른 일에 밀려 취소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많이 듣고 많이 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현상이지요. 트위팅과 같이 짧은 글에 익숙해지면서 핵심을 요약하는 능력이 생기는 반면, 깊게 보고 길게 가는 사고가 점차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새로운 변화와 혁신에 적극 동참해야 할까요? 아니면 가능한 한 최소의 기능만을 수용하고 무시할까요, 아니 무시할 수는 있을까요? 이 질문은 현대인에게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혁신성향(innovators)과 빠른 적응성향(early adopters) 등 성격의 문제일까요? 아니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호성을 가장 중요한 미션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회적 동물입니다. 서로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고, 결국은 사회의 집단적 발전에 기여하라는 미션을 받고 태어났지요. 따라서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하며 생존의 가치를 더해가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대세를 따라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본능이고 무시할 수 없는 필수적 요인입니다.
다행히도 인간은 실제로 예전 것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는 방어 장치를 동시에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 뇌의 스키마(schema)가 그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스스로의 최고 발명품들을 항상 혹평해왔다는 사실입니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 전자레인지, 심지어는 토스터조차도 초기 발명된 후 시장에서 심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발암물질부터 엄마의 정성스러운 손맛까지 해치는 것 등 다양한 죄목의 주범으로 말입니다. 실제 학문적으로도 1970~80년대 신문방송학의 화두는 무엇보다도 TV의 나쁜 영향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TV는 나쁜 사회현상의 원인이었던 공공의 적이었지요. 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는 전체적인 미디어의 나쁜 영향력보다는 디테일한 채널이나 장르에서의 다양한 기법의 효과연구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집단적 변화를 따라야 하고, 또 이를 통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더 민감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더 믿을 수 있고 더 안전하고 더 깊이 있게 관계를 회복하는 시스템과 도구를 만들어내고 활용해야 합니다. 처음 토스터는 그저 토스터일 뿐입니다. 더 적당한 온도와 습도로 구워내는 더 나은 기계를 만들어내게 하는 건 그걸 사용하는 우리 인간입니다. 누군가가 삐삐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최근의 소셜 미디어에 심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10-08-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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