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군주 리더십… 사극 속 2인자 전성시대

안방극장에 ‘세자’가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SBS ‘비밀의 문’)와 인조반정으로 축출된 광해군(KBS ‘왕의 얼굴’)의 세자 시절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기록된 이들의 삶에 상상력을 더해 이들이 시대를 앞선 정치 지도자로 성장했을 가능성을 찾는다.

광개토왕, 이순신, 이성계 등의 전쟁 영웅이나 굵직한 왕을 내세우던 사극은 2000년대 들어 정조, 세종대왕 등 ‘성군’들을 통해 군주의 리더십을 논하기 시작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 KBS 드라마 ‘정도전’(2014)은 각각 광해군과 세종대왕, 정도전을 통해 백성을 굽어살피는 정치 철학을 강조했다.

최근 안방극장의 세자 열풍 역시 이 같은 흐름 위에 있다. ‘비밀의 문’과 ‘왕의 얼굴’에서 사도세자와 광해군은 광인(狂人)이나 폭군이 아닌 탈권위주의적이고 친서민적인 소신을 가진 젊은이로 묘사된다. ‘왕의 얼굴’의 윤성식 PD는 “광해군이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백성에게 필요한 왕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들은 세자가 기득권을 상대로 분투하는 이야기 구조를 택한다. 권위주의적인 왕(영조, 선조)과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기득권(서인, 노론) 탓에 민생이 흔들리고, 세자는 이에 맞서 민생을 외친다. 이 같은 이야기는 “한국 사회의 깊어 가는 세대 갈등과 개혁의 목소리에 대한 은유”(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분석이 많다. 앞서 ‘뿌리 깊은 나무’는 세자 시절 태종과 갈등하며 개혁적인 소신을 펴고 기득권 사대부와 대립하며 서민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펼쳐내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젊고 매력적인 세자 캐릭터가 여성 시청자들을 공략하기 위함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팩션 사극 주인공으로서의 세자는 지위와 능력을 갖췄지만 후계자로서 성장통을 겪는 인물로, 트렌디드라마의 재벌 2세를 조선시대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세자 역할은 이제훈(사도세자), 서인국(광해군), 이진욱(tvN ‘삼총사’ 소현세자) 등 여성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는 미남 배우들이 꿰찼으며 퓨전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절한 멜로도 극 중 필수 요소로 첨가돼 있다.

그러나 이들 드라마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비밀의 문’은 극 초반부터 난해한 전개로 시청자들의 이탈을 부르더니 종영을 앞두고 시청률이 5%대까지 추락했다. 6회까지 전파를 탄 ‘왕의 얼굴’은 부자(父子) 갈등, 남장여자, 관상 등의 요소로 기존 사극의 클리셰를 답습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경쟁작들에 밀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왕과 세자, 기득권과 개혁 세력의 갈등이 사극 속에서 반복돼 식상함을 준다고 지적한다. 세자는 선, 왕과 노론은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도 재미를 반감시킨다.

김 평론가는 “‘뿌리 깊은 나무’는 사극에 액션과 미스터리, 정치극을 잘 버무려 중장년층과 젊은 층을 동시에 사로잡았다”면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 구도와 캐릭터만 가지고는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한편에서는 현실 정치의 민감한 고리를 사극에 투영하려는 시도가 시청자에게 부담감을 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갑을 관계, 세대 갈등, 민생 파탄 등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그리려다 보니 판타지를 찾는 시청자들의 요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시청자들이 정치 갈등을 관찰자의 위치에서 관전하기보다 자신의 상황처럼 이입해서 보도록 하는 이야기 구도”라면서 “암울한 현실을 드라마가 환기시켜 시청자들이 더 암울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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