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날 멸시할 때 또 다른 내가 필요해

내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누군가는 쉽게 해치우며 나를 도와준다.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 혼내주기, 술집에서 괴롭히는 건달 때려 눕히기 등. 그는 외로운 내 가슴 속 내밀한 얘기도 친절히 들어준다. 그런데 ‘참 고마운 그’가 직장에서 내가 애써 해놓은 일을 가로챈다. 매력적이면서 싹싹한 성격으로 동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게다가 가슴 졸여오며 지켜보던 나의 사랑까지 빼앗아 버린다. 어렵게 털어놓은 내밀한 얘기를 그대로 써먹어 가면서 사랑을 훔쳐 가는 파렴치한이다. 이쯤 되면 고마움이 아니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해야 하는 대상이다. 문제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그’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성격만 정반대일 뿐 외모와 옷차림까지 똑같은 나의 분신이다.

영화 ‘더블-달콤한 악몽’은 도스토옙스키 초기 소설 ‘분신’을 원작으로 삼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19세기 소심한 러시아 최하급 관리 ‘골랴드킨’은 21세기-혹은 20세기, 산업화 사회 속 우유부단하고 존재감 없는 사이먼 제임스(제시 아이젠버그 분)로 탈바꿈했다.

골랴드킨이나 사이먼에게나 또다른 분신이 필요한 시점은 하나다. 나의 존재가 철저히 부정당할 때, 세상이 나를 멸시할 때, 내가 세상의 먼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존중받는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때다. ‘또 다른 나’는 세상 모든 자아의 욕망이다.

그러나 골랴드킨이나 사이먼에게 가장 큰 불행은 원래의 나를 변화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이 아닌, 원래의 나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나’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자아분열과 다름없다. 세상 바깥에 내던져진 주인공은 이제 나와도 싸워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원작 속 골랴드킨은 정신병원으로 옮겨지며 끝난다. 사이먼은 더 큰 불행으로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어둡고 우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상상력이 더해지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화면 속에서도 대단히 감각적인 감독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블랙코미디다.

눈여겨볼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리처드 아요데 감독이 어떻게 1970년대 신중현이 만들고 김정미가 부른 ‘햇님’을 접했는지 궁금하다. 굳이 한국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영화가 아님에도 말이다. 영화를 본 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굳이 에티켓 때문만이 아니다. 야구뿐 아니라 영화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5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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