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벙커서 정권 최후 맞은 그바그보

지하벙커서 정권 최후 맞은 그바그보

입력 2011-04-12 00:00
수정 2011-04-12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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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에서 패하고도 권력 이양을 거부해 왔던 코트디부아르의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이 결국 11일 대통령궁 지하벙커에서 체포됨에 따라 10년간 지켜왔던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바그보는 좌파 노동운동가에서 출발해 야당 지도자로 떠오른 뒤 코트디부아르의 일당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대통령직에 오른 인물이다.

1945년 남부 마마지역에서 태어난 그바그보는 1971년 대학강사로 재직 중 ‘파괴적인 강의’를 했다는 혐의로 투옥됐고,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1982년에는 당시 정권의 탄압을 피해 파리로 망명했다.

1988년 펠릭스 우푸에 보이니 초대 대통령이 다당제 선거를 허용하자 귀국, 야당인 코트디부아르인민전선(FPI)을 창당하면서 보이니 대통령에게 도전한 첫 야당지도자가 됐다.

1990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그바그보는 이후 총선에서 FPI의 약진을 이끌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운 뒤, 2000년 대선을 통해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의 당선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40년간 코트디부아르의 정치를 지배해온 코트디부아르민주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2001년 군부 쿠데타, 2002년 군사 반란 등을 겪으며 집권 초기부터 순탄치 않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2004년 11월에는 정부군 전투기들이 북부 반군 점령지역을 공격하면서 프랑스 군기지를 폭격한 것이 화근이 돼 프랑스군의 보복공격을 받는 등 서방과도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그바그보는 2005년 10월로 자신의 임기가 종료됐음에도 지난해 10월까지 6차례나 대선을 연기하며 정권을 유지해 왔다.

더구나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 알라산 와타라 전 총리에게 패했지만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헌법위원회도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이유로 득표율을 재산정, 그바그보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선언해 극심한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지난해 12월 4일 와타라 전 총리와 그바그보 대통령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며 코트디부아르는 2명의 대통령을 둔 사상 초유의 나라가 됐다.

유엔과 아프리카연맹 등 국제사회는 1타라 정부를 코트디부아르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그바그보의 퇴진을 촉구했지만, 그바그보는 권력을 놓지 않았다.

대선 결과 불복에 따른 그바그보와 와타라의 갈등은 내전 상황으로 비화했다.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바그보는 남부 가톨릭 세력을, 무슬림인 와타라는 북부 이슬람 세력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양보 없는 혈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1천여 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지는 등 민간인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결국 코트디부아르 유엔 평화유지군과 프랑스군이 대통령궁과 대통령관저, 군기지를 폭격하면서 그바그보 군대는 무력화됐고, 그바그보는 이날 대통령궁 지하벙커에서 10년 집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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