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棋聖 우칭위안 9단, 100세에 돌 거두다

영원한 棋聖 우칭위안 9단, 100세에 돌 거두다

입력 2014-12-02 00:00
업데이트 2014-12-02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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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바둑 창시자’ 별세

바둑계의 ‘큰 별’이 졌다. ‘현대 바둑의 창시자’ ‘영원한 기성(棋聖)’로 불리던 우칭위안(吳淸源) 9단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기원은 1일 우칭위안이 지난달 30일 새벽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에서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다. 그는 1933년 바둑의 혁명으로 불리는 ‘신포석’(新布石)을 만들어 현대 바둑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1930~1950년대 일본 바둑계 1인자로 군림하며 ‘바둑의 신’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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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칭위안(吳淸源) 9단 연합뉴스
우칭위안(吳淸源) 9단
연합뉴스
특히 그는 ‘바둑 황제’ 조훈현(61) 9단의 동문 사형(師兄)으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일본 바둑계 원로인 세고에 겐사쿠(1889~1972)는 평생 한국과 중국, 일본에 한명씩 3명의 내제자만을 뒀는데 중국에서는 우칭위안, 일본에서는 하시모토 우타로, 한국에서는 조훈현이었다. 우칭위안은 1928년에, 조훈현은 1963년에 각각 세고에의 내제자로 들어갔다.

우칭위안은 1914년 중국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에서 태어나 부친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 처음 ‘돌’을 잡았다. 세고에 문하에 들어가 평생 바둑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엄청난 노력파였다.

1933년에는 기타니 미노루(당시 5단)와 함께 ‘신포석’을 발표했는데 이는 ‘흉내 바둑’과 ‘3·3, 화점, 천원 착점’ 등 기존 관념을 깬 파격적인 포석이어서 당시 바둑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1939년부터 시작된 기타니와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 승리하며 일본 바둑계 1인자로 등극했다. 이후 1956년까지 이어진 가리가네 준이치, 후지사와 구라노스케, 하시모토 우타로, 이와모토 가오루 등과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도 거푸 이겨 일본 바둑계를 평정했다. 10번기 총전적은 10승 1무 1패였다. 1984년 은퇴한 뒤 부인과 함께 오다와라시 요양원에서 말년을 보냈다. 문하에는 국내에서 활동했던 중국인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과 린하이펑(林海峰) 9단을 두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일본에서 그의 ‘백수(百壽) 축하연’이 열리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도 그의 별세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일본 NHK는 고세이겐(우칭위안의 일본식 명칭) 별세를 보도하며 “화려하고 자유로운 기풍과 압도적인 힘으로 팬을 매료해 ‘바둑의 신’으로 불렸다”고 평가했고, 아사히신문은 “신포석을 발표해 바둑계의 혁신을 가져왔다”고 그의 업적을 전했다.

중국 반관영인 펑파이(澎湃)신문망은 그가 중국 출신의 귀화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그가 세 차례 국적을 바꾸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집중 조명했다. 펑파이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던 1936년 일본 내 활동 편의를 위해 일본으로 귀화했는데 중국에서는 배반자로 낙인 찍히고 일본에서는 중국을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1946년 일제 패망 직후 화교 이웃들이 패전국의 국적을 버려야 한다며 제멋대로 그의 국적을 취소시켜 3년간 무국적자로 떠돌았다. 이후 대만 국적으로 살다가 1979년 아이들의 학업과 취업 문제로 다시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펑파이는 그가 말년에 중·일 우호를 위해 힘썼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2014-12-0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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