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연구실장 “정조의 강력한 개혁이 공론정치 파괴해”
알려진 것과 달리 성리학적 세계관이 북학파와 개화파를 품고 있을 정도로 유연했다면, 조선이 망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백성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남는 것은 ‘임금 탓’이다. 성리학 자체도 유연하고 우국충정 가득한 유학자들도 넘쳐났다면, 이를 잘 가려 쓰지 못한 왕의 잘못이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의 ‘정조 사후 63년-세도정치기의 국내외 정치연구’(창비 펴냄)다. 정조의 리더십을 연구했던 저자가 정조 이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를 분석한 책이다.박 실장이 보기에 조선의 최후는 이미 정조 시대에 잉태되어 있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 실장이 거머쥔 키워드는 ‘공론정치’다. 공론정치는 사림의 여론정치로 조선 성리학이 드러나는 형식이기도 하거니와 이 때문에 당쟁으로 격하되기도 하고 붕당으로 부활하기도 한 개념이다.
조선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공론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정조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가 바로 이 공론정치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박 실장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정조실록을 토대로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고위 공직자에 대한 대간(臺諫·고위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대관과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는 간관을 합쳐 이르는 말)의 탄핵 활동을 통계치로 뽑아봤다. 그 결과 재위 20년이 중요한 분기점으로 나왔다. 이때를 고비로 매해 7~40회에 이르던 탄핵 건수가 1~5건으로 급격하게 감소한다. 동시에 이 시기 이후 탄핵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0건이 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금지시키는 금령(禁令)도 빈번하게 행사됐다. 재위 기간 동안 정조는 모두 163건의 금령을 내렸는데 이 가운데 109건(66%)은 특정 사안에 대한 상소나 언급을 금지하는 등 공론정치에 관련된 내용이다.
널리 알려졌듯 정조는 조선의 개혁을 꿈꿨다. 왕과 백성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사림 세력이라 불리는 중간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를 수립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때문에 신하들의 목소리를 당쟁에 빠진 목소리라 규정해 국정에서 배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박 실장은 정조 사후 ‘정조 체제’가 그렇게 빨리 무너져 버린 이유를 정조 자신에게서 찾는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것은 결국 “권력 독점 및 부패를 방지하고 정책 아이디어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조선 왕조의 공론정치 체제가 형해화된 상태에서 견제받지 않은 소수의 외척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1-03-0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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