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작가’ 이재삼을 만나다
“어느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은 안 된다고 그러대요. 목탄이 묻어나 운반, 보관이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직접 문질러 보라고 그랬죠. 묻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그걸 확인하고서야 (작품을) 구입하더군요. 이게 소문이 나면서 다른 곳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뜨끔했다. 목탄 하나로만 그렸다기에 가루가 날리지 않을까 궁금했다. 게다가 작품에 바짝 붙어서 보면 목탄이 뭉텅이째 캔버스에 들러붙은 게 아니다. 목탄 가루 하나하나가 물고기 비늘처럼 삐죽삐죽 돋아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축하인사차 방문한 지인들이 작가를 지하 전시장에 붙들고 있을 동안, 잽싸게 1층 전시장으로 올라가 슬쩍 문질러 봤던 터였다. 그러고는 시치미 뚝 떼고 있는데 작가가 이런 말을 하니 양심상 ‘자수’할 수밖에.
자신의 ‘달빛-심중월’(心中月) 연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재삼 작가.
●소나무 말고 소나무가 빨아들인 달빛 보세요
“하하. 안 그래도 만져 보시는 분들 많아요. 그냥 칠만 해서는 모두 뭉개져 버려요. 한겹 입히고 코팅하고, 다시 한겹 입히고 코팅하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제가 2년의 실험 끝에 얻어낸 비법이에요. 그래도 제발 눈으로만 봐 주세요.”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이재삼(51) 작가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영업기밀”이라며 말을 닫았다. “물론 언젠가 때가 되면 공개할 겁니다. 후학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니까요.”
그는 가로 세로 5m가 넘는 대작을 그리는 작가다. 그런데 그리는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란다. 전에 그린 대나무 시리즈가 대나무보다 그 속의 바람소리를 표현했듯, 이번에 내놓은 소나무 시리즈에서도 소나무 대신 소나무가 흠뻑 빨아들이고 있는 달빛을 봐 달라고 주문한다.
목탄 하나로만 그린 소나무를 통해 한국인 감성 밑바닥에 있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9시 출근 5시 퇴근 ‘9 to 5’ 원칙 고수
작업 스타일도 재미있다. 경기 과천의 큰 농협 창고를 빌려 일하는데 ‘9 to 5’(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 원칙을 고수한다. 고뇌하는 예술가는 날밤도 새우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던가.
“밤에 쓴 연애편지를 낮에 보면 찢어 버리게 되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아예 공무원처럼 살아 보자고 한 거죠. 덕분에 오해도 받았어요. 과천에 오기 전에 3년 반 동안 장흥 예술인 마을에 있었는데, 5시면 퇴근해 버리니 별로 어울리질 못했죠. 나중에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요.”
‘달빛 작가’인데 정작 달빛하곤 무관한 셈이다.
●“지금의 동양화는 먹공예품 아닌가요”
이 작가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했다. 젊은 시절에는 최첨단 설치미술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동양적 느낌의 작업을 하게 됐을까.
“서른일곱쯤에 사춘기를 앓았어요. 한국 사람인데 왜 이런걸 하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서양화에서도 목탄은 간단한 드로잉 재료예요. 그걸 본격적인 회화도구로 바꿔 보기로 결심한 겁니다.”
‘아슬아슬한’ 말도 나온다. “모든 예술에는 시대의 감성이 얹혀야죠. 지금 동양화? 먹공예품 아니던가요. 서양화요? 작품 자체보다 브리핑(설명)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지 말고 동, 서양화 구분 없이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면서도 지금 시대의 감성을 얹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소나무는 친숙하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이다. 주변에 벌레나 잡초가 있을 법도 한데 그림 속엔 달빛에 창백하게 빛나는 소나무뿐이다. 그것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크기로. 이 압도적인 크기를 찾기 위해 전국의 유명하다는 소나무는 다 찾아다녔단다. 안 그래도 큰데, 작가의 시점(視點)이 올려다보는 것인지라, 소나무는 한층 더 위압적이다. 달빛 풍경화나 소나무 정물화라기보다 옛 그림의 벽사(辟邪·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같은 느낌도 든다.
전시 제목은 ‘달빛을 받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달빛 녹취록’이었다.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아 일부러 안 썼다.”는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달빛이 두꺼운 소나무 속살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으니까.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 (02)725-102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1-03-2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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