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승자총통으로 싸운 명량대첩

소소승자총통으로 싸운 명량대첩

입력 2012-11-28 00:00
수정 2012-11-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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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진도 오류리 해저에서 발굴한 소소승자총통 3점 등은 조선의 무기사를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내용을 명확히 규명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함께 찾은 석제 포환과 발굴 위치 등을 살펴보면 이들 총통이 명량대첩에 쓰였다고 추정할 수 있어 관심이 더욱 높다.

그렇다면 당시 명량 바다의 격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597년(선조 30년) 임진왜란의 2차 침략전쟁으로도 불리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1차 전쟁 이후 조선과 왜가 시도한 화의 조정이 깨지면서 일본이 다시 해상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당시 경상·전라·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원균이었다.

그의 수군이 다대포와 칠천곡에서 대패하며 사실상 해상권을 잃게 됐고, 전쟁의 패색은 짙어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유성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으로 파직당했던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였다.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통제사직을 다시 맡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수군에게는 전함 12척과 일반 백성이 가져온 배 1척만이 남아있어 전력이 매우 취약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고 말하며 전의를 다졌다.

이순신은 왜 수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뿐만 아니라 서해로 진출해 육상으로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길목인 명량 바다에 진을 쳤다.

처음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에 주둔한 이순신의 수군은 전남 진도군의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긴 후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1957년 9월 15일 해남군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이동했다.

치열한 전투는 다음 날 벌어졌다.

이른 아침 왜 수군은 133척의 전함을 몰고 명량 바다를 침략했고 조선 수군은 단 13척의 전선으로 이들을 막아냈다.

이 때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며 일본 장군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파했다고 알려졌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해상권을 회복하고 조선 수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연구소 측은 이번에 발굴된 총통이 명량대첩에 긴히 쓰였을 것으로 분석했다.

총통의 제작 시기와 장소가 임란 직전 전라좌수영이며, 발견된 장소가 명량대첩의 격전장과 인접한 곳이라는 것이다.

연구소 측은 “이 같은 내용을 볼 때 이순신, 그리고 명량대첩과 관련한 유물임이 거의 분명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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