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참배할 한국천주교 ‘순교자의 땅’ 내포-2

교황이 참배할 한국천주교 ‘순교자의 땅’ 내포-2

입력 2014-04-24 00:00
업데이트 2014-04-24 10:1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진둠벙, 여숫골, 숲정이……. 충남 서산의 천주교 해미 순교성지의 지명에는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명의 순교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이다.

진둠벙은 해미읍성의 처형장이 넘쳐나자 두 팔이 묶인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에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 생매장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에는 ‘죄인둠벙’이었다가 점차 진둠벙으로 불리게 됐다.

여숫골은 순교자들이 생매장터로 끌려가면서 ‘예수, 마리아!’라고 부르짖던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여수(여우) 머리’로 잘못 알아들은 데서 비롯됐다. 지금은 논으로 개간됐지만 병인박해(1866∼1868) 당시에는 나무가 우거져 ‘숲정이’라 불렸다. 마을사람들이 땅을 일굴 때 수없이 많은 유해가 나왔는데 뼈들이 수직으로 선 채로 발견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둠벙과 유해 발굴터가 남아 있어 참혹했던 당시의 흔적을 보여준다.

순교자들의 재판을 했던 읍성의 동헌부터 해미 시내를 거쳐 이곳에 이르는 1.5㎞ 구간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에는 성지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가 걸었던 이스라엘의 14처를 잇는 길 못지않은 고난의 행로다.

해미는 초기에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의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들어선 군사요충지였다. 1790년대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 3천여 명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해미의 진영장은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분 삼아 독자적인 처형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해미에서는 서해안 일대에서 붙잡힌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이곳에서 죽어간 이들은 이름 없는 서민들이었다. 어린이들의 치아도 많이 발굴된 해미 성지에는 신자들을 오랏줄로 묶어 곡식 타작하듯 내동댕이쳐 죽였던 돌다리 ‘자리개 돌’도 보존돼 있다.

해미읍성에는 철삿줄로 목을 매달아 처형했다는 호야나무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8월 17일 해미읍성에서 10만여 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집전에 앞서 해미 성지를 방문해 순교자 묘를 참배하고 기도한다.

지금의 홍성 지역인 조선시대 홍주목은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을 정도로 천주교세가 강했다. 홍주 성지에는 기록상으로 211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의 순교자까지 합치면 700명가량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주의 대표적 순교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는 처음 체포된 백정 황일광, 무자비한 매질에도 죽지 않자 한겨울에 물을 끼얹어 동사시킨 원시장(1732∼1793) 등이 있다.

당진의 신리 성지는 단일 마을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400명을 헤아리던 신리의 신앙공동체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 42명. 이들 가운데 손 씨가 18명이나 되지만 지금은 신리에 손 씨가 단 한 명도 없다.

신리에는 천주교 박해시절의 주교관 중 유일하게 남은 ‘성 다블뤼 주교관’이 있다. 신앙 고백을 위해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었다는 손자선의 생가이기도 한 이 초가집은 제5대 조선교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교구청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곳에서 초창기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 사적을 수집·정리해 파리외방선교회로 보낸다. 이 자료가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다블뤼 비망기’다. 한국의 103위 성인과 올해 시복되는 124위의 시복시성의 결정적인 근거자료가 됐다.

프랑스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다블뤼 주교는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리면서 한국 풍속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보신탕까지 즐긴, 가장 한국적인 외국인 사제였다.

1845년 한국에 들어온 뒤 1866년 3월 병인박해 때 체포돼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됐다.

오는 5월 6일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신리 성지에서 열리는 다블뤼 주교 기념관 축복식에는 프랑스에 사는 후손들이 직접 방문해 순교 때 입었던 그의 옷과 용품, 중백의 등 30여 점을 기증한다.

신리 성지 김동겸(36) 신부는 “다블뤼 주교는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초기 한국천주교를 기록한 증인이었다”며 “그가 없었다면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 성인의 시성과 교황 프란치스코가 집전할 124위 시복식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많이 본 뉴스
최저임금 차등 적용, 당신의 생각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심의가 5월 21일 시작된 가운데 경영계와 노동계의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최대 화두는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 적용’입니다. 경영계는 일부 업종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요구한 반면, 노동계는 차별을 조장하는 행위라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찬성
반대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