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종 소설 ‘거룩한 속물들’
KBS 개그콘서트 코너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를 외치며 남자들의 ‘인권’을 부르짖는다. 이들은 주로 남자친구에게는 절대 돈을 쓰지 않고 자신에게 좋은 것만 좇는 이기적인 여자들을 공격한다.이런 여자들을 가리켜 소설가 오현종은 ‘속물’이라고 지칭한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거룩한 속물들’(뿔 펴냄)은 속물들과 그 속물을 양산하는 사회에 대해 은근한 비판을 던진다. 속물이 속물이 되거나, 속물인 척 해야만 하는 삶의 역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3명의 ‘속물 여대생’이 있다. 졸업을 1년 앞둔 사회복지학과 동기인 이들은 전공실습으로 생활보호대상 노인들을 돌보면서도 가난을 죄악시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솔직하게 스스로를 속물이라 칭한다. ‘기린’은 “너무 돈이 없어서 비루한 속물”이고 ‘명’은 “너무 돈이 많아 고상한 속물”, ‘지은’은 “그냥 원래 속물”이다.
화자는 기린이다. 기린은 ‘럭셔리’한 친구들의 소비생활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과외지도를 한다. 그녀는 수입산 생수병에 정수기 물을 넣어 마시고, 미래를 위해 ‘감자’같이 생긴 의대생을 만나는 ‘속물 중의 속물’이다.
그녀의 속물근성은 너무 솔직하고 착실해 일면 거룩하기까지 하다.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게 아니라 죽도록 불편한 것이다. (중략) 당신은 가난해지고 싶은가?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라며 나름의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철저히 정당화한다.
주변에도 속물은 가득하다. 등장인물들을 보다보면 세상에는 대체 속물 아닌 사람이 있을까 싶다. ‘SKY’ 간판만을 앞세우는 기린의 아버지, 유산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명의 친척들, 섹스 뒤에는 표정이 변하는 지은의 남자들, 모두가 철저히 속물적 인간들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들은 살기 위해 스스로 속물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건,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린은 사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문학소녀의 꿈이 있어도 이를 남들 앞에 쉽게 꺼내 놓지 못한다.
소설은, 너무 현실적이라 서글픈 이야기들을 발랄한 문체로 풀어놓는다. 세 여대생의 배배 꼬인 심사에 어울리는, 무례한 듯하고 다분히 공격적인 단문이다. 여기에 20대 여대생의 내면을 솜씨 좋게 풀어낸 심리묘사는 작가가 전작들에서부터 보여준 특기다.
책은 지난해 7월부터 5개월 동안 문학웹진 ‘뿔’(blog.aladdin.co.kr/ppul)에 연재한 내용을 묶었다.
작가는 “어떨 때는 속물이 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밀려나는 느낌을 갖게 된다.”며 “그런 절박한 기분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2010-02-2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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