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책세상] 옌거링의 ‘루판옌스’

[지구촌 책세상] 옌거링의 ‘루판옌스’

입력 2014-06-28 00:00
수정 2014-06-28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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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이 산산조각낸 한 사내의 삶

“중국이여,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가.”

소설 제목 ‘루판옌스’(陸犯焉識)는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년) 당시 노동교화소에서 죄수인 주인공 루옌스(陸焉識)를 부르던 이름이다. 문혁 당시 지식인들은 타도 대상으로 지목돼 변방 노동 현장이나 감옥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이들은 자신의 성명 사이에 죄수를 뜻하는 ‘판’(犯)을 넣은 이름으로 불려졌다. 루판옌스의 루(陸)는 ‘중국 대륙’을, 옌스(焉識)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가’란 뜻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처참한 문혁의 역사를 기억하는지를 묻고 있다.

책은 재미 화교 작가 옌거링(嚴歌?)이 2012년 초에 펴낸 장편소설이다. 지난 5월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에 의해 영화 ‘귀래(歸來·돌아오다)’로 각색돼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원작도 덩달아 베스트셀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문혁은 중국을 무질서와 파국으로 이끈 광기의 역사다. 홍위병들이 부르주아 세력과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며 전역에서 파괴 행위를 일삼았고 이 과정에서 신장(新疆) 등 변방 오지로 끌려가 얼어죽고 굶어죽은 지식인만 수백만명에 달한다. 당시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비판하는 투쟁이란 이름의 잔혹행위 속에서 중국인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너졌다.

소설 ‘루판옌스’는 문혁으로 망가진 루옌스와 그 가족의 인생을 통해 문혁을 고발하고 있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유학파 루옌스 교수. 서양 문화와 풍류를 즐기던 그는 문혁 때 부르주아로 지목돼 변방 노동교화소로 끌려간다. 참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기는 무기징역으로 늘어난다. 그곳에서 10년 넘게 버텨냈지만 그의 지성과 낭만 그리고 자존은 산산조각이 난다. 정략결혼으로 만나 지루하게만 여기던 아내 펑완위(馮婉玉)와의 평범한 결혼 생활을 동경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나 막상 문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가족 사이에서 그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영화 ‘귀래’는 이 책의 마지막 30쪽가량을 각색해 만든 것이다.

소설은 문혁을 고발하고 있지만 정작 문혁의 피해자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조금도 저항하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문혁으로 인해 망가진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거나 망각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감시와 탄압에 밀려 광기어린 마오쩌둥(毛澤東)의 역사와 공산당 일당독제 체제에 순응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닮아 있는 듯하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2014-06-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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