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서른줄에도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서른줄에도

이슬기 기자
입력 2019-06-06 23:00
수정 2019-06-07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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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담아줘/박사랑 지음/자음과 모음/272쪽/1만 3000원

30대에 접어든 아이돌 덕후 여자 셋
자금·행동력 갖춰 ‘빠순질’ 하기 더 좋아
보고싶어 하는 덕질, 남 눈치볼 거 있나
작가도 수년째 ‘빠순이’로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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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빠순이’들에게 ‘오빠’는 ‘오빠’다. 내 나이나 오빠의 나이와는 관계없이. 사진은 지난해 10월 해체 후 17년 만에 다시 뭉친 H.O.T.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018 포에버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 콘서트’를 연 모습. 서울신문 DB
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빠순이’들에게 ‘오빠’는 ‘오빠’다. 내 나이나 오빠의 나이와는 관계없이. 사진은 지난해 10월 해체 후 17년 만에 다시 뭉친 H.O.T.가 서울 송파구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018 포에버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스 콘서트’를 연 모습.
서울신문 DB
여자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해마다 특정한 날이면 흰 우비를 입고 다니는 언니들이 있었다. 매년 3월 14일이면, 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들 중 하나와 생일이 같다는 이유로 두 손 가득 하얀 박하사탕을 받았다. 친구들이 “언니, 얘도 오늘 생일이에요!” 하면 언니들은 하나같이 놀란 눈을 하고 “정말?” 하며 살갑게 반가워했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이런 사소한 우연에 꺄르륵 웃을 수 있는 힘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언니들은 나이 들어 무엇이 되었을까. 더러 이탈자도 생겨나겠지만 대부분은 ‘나이 든 빠순이(극렬 여성 팬)’가 된다. ‘본격 아이돌 소설’을 표방하는 ‘우주를 담아줘’는 아이돌 덕후인 삼십대 여자 셋, 디디와 과 제나의 사랑과 우정 얘기다. 고3 겨울, 같은 반이었으면 친해졌을지 알 수 없을 그들은 팬사이트에서 오로지 좋아하는 오빠들을 매개로 친해졌다. 디디는 좋아하던 멤버의 이니셜에서, ‘크리스티나’였던 은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에 나오는 닥터 크리스티나 에서, 제나는 ‘언제나mvp’라는 닉네임에서 각각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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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바래지 않는다면 서른줄의 ‘빠순질’은 더 용이하다. 돈과 시간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티켓팅에 실패하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티켓을 살 수 있는 자금력을 갖췄고 국내 공연에 실패하면 해외 공연에 갈 수 있는 행동력까지 갖춘 삼십대 빠순이니까. 누가 인생은 삼십대부터라고 말하던데, 나는 빠순질 역시 삼십대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야 좀 할 만해졌다고나 할까.”(14~15쪽) 소녀들은 어른이 되어 번역가가 되고, 학교 선생님이 되고, 회사원이 되었지만 좋아하는 ‘오빠들’ 아래서 흥성거리는 마음은 그 시절 그대로다. 콘서트 티켓을 거래하러 만난 여자가 같은 브랜드의 초콜릿을 들고 나온 것은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니겠지만 이들에게는 ‘찌릿’ 하는 동류의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디디는 인터넷 연예 기사를 훑다가 ‘일본 유명 아이돌, 이마무라 유야 중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된다. 유야는 디디가 사랑했던 옛날 오빠, 구 아이돌이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세상을 떠난 유야에게는 자살 의혹이 인다. 급히 휴가계를 내고 일본행 비행기를 타는 디디. 이런 그를 별말 없이 다독여주는 과 제나다. 사랑하는 아이돌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디디의 결정이 새삼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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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랑 작가
박사랑 작가
소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보다 늘 우위에 있는 감정은 ‘보고 싶다’였다. 항상 보고 싶었다. 보러 가는 길에도, 보고 있을 때에도, 더이상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44~45쪽) 30대가 되어서도 계속되는 덕질의 실체는 저 몇 줄에 요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질은 보아서 즐거운 것, 즐겁기 위해 보고, 보고서 즐거운 오만 가지 일들 중 하나인 것이다. 남이 무용하다, 지적할 일은 하등 아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은어들, 가령 뜻밖에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덕후가 됨을 비유하는 말인 ‘덕통사고’, 특정 연예인의 팬임에도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지칭하는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덕후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기 힘들다는 뜻의 ‘덕계못’(덕후는 계를 못 탄다) 등은 오늘도 평화로운 그들의 나라를 은유한다.

2012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가의 첫 장편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 “오직 즐겁기 위해 썼다”고 했는데, 종이 위를 신나게 내달리는 문장에서 그 말을 오롯이 실감할 수 있다. 작가는 소개말에 이렇게도 썼다. “7년간 소설가로, 2n년간 빠순이로 살아가는 중.”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9-06-07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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