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등재된 600년 수호목… 세금 내고 장학금도 줘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사람과 똑같은 자격과 지위를 가지고 600년을 살아온 나무다. 명백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증명하는 호적번호를 가졌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까지 소유했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부여된 납세의 의무로 재산세, 즉 토지세도 꼬박꼬박 물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토지에서 끊임없이 재산을 증식할 줄도 안다. 더 기특한 것은 재산의 용처다. 수굿하게 사람살이에 끼어들어 한푼 두푼 모은 재산을 마을 살림살이를 위해 흔쾌히 내놓는다. 이른바 장학금이다. 장학금을 주는 나무라니!이름과 재산을 갖고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온 석송령의 신비로운 자태.
경북 예천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동구 밖에 서 있는 석송령이 그런 나무다. 서 있다고 했지만 ‘누워 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폭이 위로 자란 키의 세 배 정도 되기에 하는 이야기다.
“해마다 장학금을 줬어요. 마을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학자금을 지원하는 거죠. 그런데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서 올해는 장학금을 주지 못했어요.”
이동섭(59) 이장은 그동안 석송령이 꾸준히 마을 아이들을 키워 온 훌륭한 나무라며 장학금을 준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이야기 끝에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시골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재산세를 납부하며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곳에 재산을 내놓는 나무는 예천 천향리 석송령 외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자연유산이 아닐 수 없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건 600년 전이다. 당시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개울로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 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본 나그네가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게 시작이라고 한다.
나무는 그때부터 석평마을의 수호목이 되어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불길한 잡귀를 막았고,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올렸다. 사람에 의해 얻은 생명을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데에 바친 격이다.
“마을 당산제는 예천군에서도 유명해서 예천군수가 종종 참석해 축원문을 읽기도 하죠.”
해마다 정월 대보름 자정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올리는 석송령 당산제는 오늘날까지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며 이 이장은 석송령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털어놓는다.
●주민 이수목 호적에 올려 재산 물려줘
나무가 사람과 똑같이 ‘석송령’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기되고 재산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재산은 넉넉했으나 아들이 없어 근심이 많았다. 그가 어느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걱정하지 마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이 나무였다. 그는 문득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고 곧바로 군청으로 달려갔다.
그는 마치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듯 나무의 호적을 만들었다.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씨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영혼 영(靈)과 소나무 송(松)을 써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적 등기를 마치고 이어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토지 6611㎡(2000평)를 나무에 등기 이전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석송령이 가진 땅에는 지금 세 채의 살림집이 들어가서 살면서 이용료를 내지요. 석송령 통장에 그 이용료를 잘 갈무리합니다. 지금은 약 3000만원 정도 들어있어요. 그걸로 장학금도 주고 토지세도 냅니다.”
●올해 재산세 4만2530원 납부
석송령은 자신의 토지 이용료로 세 집으로부터 가구당 60㎏(100근)의 쌀을 받는다. 성실하게 재산을 늘려가면서 자신도 꼬박꼬박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인 재산세 납부 의무를 실천한다. 올해 석송령이 납부한 재산세는 4만 2530원이다.
국민 자격으로 재산권을 행사한다는 내력만으로도 세계적인 나무임에 틀림없지만 석송령은 생김새도 매우 아름다운 나무다. 나무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나뉘며 옆으로 펼쳐지는 반송(盤松) 종류다.
●나무그늘 1071㎡… 군민들이 보호 앞장
600년을 살아온 석송령은 키가 10m 정도 된다. 키로 보아서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으나 가지 펼침은 상상을 초월한다. 동서로 24m, 남북으로 30m나 된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로 그가 지어내는 그늘은 무려 1071㎡(약 324평)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지키지만 군 차원에서도 나무를 정성껏 관리한다.
“병해충 방제 등 상시 관리를 합니다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마을분들이 워낙 잘 보호하고 있어서 나무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천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이 나무를 지방의 자랑으로 여기거든요.”
예천군청 문화재 담당 최재수(43)씨는 석송령에 신경을 쓰긴 하지만 굳이 군청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예천군민 모두가 잘 지키는 나무라고 강조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마치 사람처럼 여기며 긴 세월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자연주의 정신, 혹은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느끼게 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글 사진 예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2012-03-1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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