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넓고 깁니다 … 아등바등 일상 다 털고 가렵니다
충남 태안은 해안 풍경이 좋습니다. 내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해안가에 국립공원을 끼고 있지요. 곧은 해안선을 가진 곳에선 돌아서면 바다, 또 돌아서면 마을이지만, 라면처럼 굽은 리아스식 해안선을 가진 곳에선 바다와 마을, 산, 그리고 포구가 한눈에 잡힙니다. 이런 다양한 풍경을 가진 곳이 태안입니다. 만리포 해변은 그 중 첫손 꼽히는 경승지입니다. 낡은 여행지처럼 느껴지는 이름과 달리 빼어난 풍경을 가진 해변입니다. 만리포 옆으로는 천리포와 백리포가 각각 덩치 순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이름만큼이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을 가진 세 해변을 돌아보자니, 쥐꼬리만큼 짧은 가을볕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더군요. 여기에 안면도 최고의 일출 전망대로 꼽히는 안면암까지 돌아본다면 만추에 이른 태안을 둘러보는 여정으로 모자람이 없겠습니다.백사장 길이가 3㎞나 되는 만리포 해변. 낡은 여행지라는 이미지와 달리 깔끔하고 너른 풍경을 품고 있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
만리포 해수욕장의 ‘만리포 사랑’ 노래비 앞에 섰을 때다. 저절로 스피커에서 옛 노래가 흘러 나온다. 먼지 폴폴 날리는 낡은 레코드판의 음색이다. 하긴 1958년에 발표됐으니 ‘유물’이나 다름없는 노래일 터. 한데 드넓은 만리포 해변을 앞에 두고 노래를 듣자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촌스러움 따윈 없다. 되레 은근히 가슴이 설렌다. 노래가 당대를 풍미한 것에 대한 당위성마저 느껴진다.
만리포에 서면 맨 먼저 백사장의 길이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이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있다. 태안군청 홈페이지는 이를 약 3㎞라 적고 있다. 그런데 과장이 심하다. 채 십리가 못 되는 거리를 두고 만리(萬里)란다. 물론 물리적 거리는 아니고, 인근의 천리포나 백리포 등에 견줘 넓다는 걸 강조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역사적 사실에서 이름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조선 세종 때, 명나라 사신 일행이 중국 땅과 가장 가까운 안흥항을 통해 입국하려다 풍랑으로 이웃한 막동(현 천리포)에 상륙했다. 이들이 돌아갈 때는 막동 인근의 ‘만리장벌’을 이용했는데, 여기가 오늘날 만리포라는 것. ‘만리’는 넓다, ‘장벌’은 긴 모래해변을 일컫는 현지 사투리니, 만리포를 표현하기에 제격인 듯하다.
만리포 해변에 서면 장쾌하다. 고만고만한 서해안의 해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다. 똑딱선의 뱃고동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청명한 하늘과 맑은 햇살, 그리고 파란 바다가 대신하고 있다. 경사 완만한 모래 위엔 휴식을 즐기는 갈매기와 제 집 찾아 들어간 게의 흔적들로 빼곡하다. 만리포 해변의 양 옆은 해안절벽이다. 왼쪽 끝부분의 모항항까지는 가보는 게 좋겠다. 해안절벽의 풍취도 빼어나고, 작은 포구 풍경도 정겹다.
날물때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여우섬(왼쪽)과 조구널섬.
묘한 형태의 닛사 나무 등 1만 3200여 종의 초목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는 만리포와 이웃한 해변이다. 둘 사이에 작은 바위산 하나가 바다 쪽으로 돌출돼 경계를 이룬다. 그 바위산 중턱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수목원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으로 평가받는 천리포 수목원이다.
수목원을 세운 이는 1945년 미군 장교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1979년 귀화한 미국인 민병갈(1921~2002)씨이다. 미국 이름은 칼 페리스 밀러. 북한에도 있는 수목원이 남한에 없다는 게 못내 안타까웠던 그는 1962년 소금기 많은 박토를 사들여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귀화인의 손에 의해 한국 최초의 수목원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이후 그는 평생 비공개로 식물을 가꿨고, 식물원은 그의 사후인 2009년 3월에야 일반에 개방됐다. 그나마 전체 7개 구역 가운데 ‘밀러 정원’만 개방했을 만큼, 아직도 일반인의 발걸음이 제한되는 지역이 많은 비밀스러운 정원이다.
야트막한 둔덕에 난 탐방로가 조붓하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못가의 ‘닛사’가 특히 눈길을 끈다. 가지가 땅바닥까지 처져 있는 나무다. 해설판엔 묘한 생김새 때문에 연인들이 좋아한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란 견해가 ‘우세’하다.
수목원엔 다양한 식물들이 식재돼 있다. 특히 목련 400여 종, 호랑가시나무 370여 종 등 세계적인 희귀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전체 식물은 1만 3200여종에 이른다. 이 덕에 사시사철 꽃이 피는데, 이맘때면 가을 벚꽃이나 국화류의 꽃들과 만날 수 있다.
수목원은 세련된 자태를 하고 있지 않다. 수수하고 다양한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간다. 잘 조경된 수목원을 연상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수목원은 보석 같은 존재다. 2000년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화려한 형태의 탑들이 인상적인 안면암.
내친 걸음 백리포 해변까지는 가보자. 천리포에서 2㎞쯤 떨어져 있다. 만리포 등에 견줘 규모가 작고 덜 알려져 사람들이 아껴두고 찾는다는 곳이다. 다만 곱지 않은 인심과 마주할 각오는 미리 해두는 게 좋겠다.
해변 진입로는 철문으로 잠겼고, 주차장 등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은 아예 없다. 바다로 향한 길목엔 펜션들만 가득하다. ‘고객’으로 가지 않는 이상 주차도 만만치 않다. 사유지가 여행지 길목을 가로막는 경우가 어디 이곳뿐이랴. 하릴없이 해변 초입의 산자락에 조성된 전망대에서 일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백리포의 아쉬움은 안면도에서 달랜다. 드라이브 명소로 꼽히는 77번 국도를 타고 안면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필경 꽃지 해수욕장 등 명소들이 도중에 발목을 잡겠지만, 이번만큼은 곧장 가자. 알싸한 향기 가득한 정당리 솔숲길을 지나면 곧 안면암이다. 안면도의 대표적인 일출 명소 중 한 곳이다.
안면암은 1998년 창건됐다. 3층 높이의 대웅전과 용왕각 등 다수의 건물로 구성됐다. 안면암은 절집의 자태보다 주변 풍경이 훨씬 빼어난 곳이다. 절집 앞으로는 너른 갯벌이 확 트인 풍광을 선사하고, 멀리 여우섬과 조구널섬의 자태도 아련하다. 조구널섬은 한때 조기가 많이 잡혀 섬 전체에 널어 말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엇보다 썰물 때 갯벌 위에 놓여진 부교를 따라 조구널섬까지 걷는 맛이 각별하다. 반대로 밀물때는 부교를 따라 바다 위를 걸을 때마다 일렁이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글 사진 태안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으로 나와 32번 국도로 갈아탄 뒤, 만리포 방향으로 곧장 가면 된다.
▲맛집:태안의 별미 가운데 하나가 ‘아나고 통구이’다. 갓 잡은 붕장어를 양념 없이 굵은 소금만 뿌린 뒤 석쇠에 구워 먹는다. 만리포 옆 모항항의 음식점 대부분에서 맛볼 수 있다. 원북면 중앙통의 원풍식당(672-5057)은 박속밀국낙지탕, 태안등기소 앞 토담집(674-4561)은 우럭젓국으로 각각 이름났다.
▲잘 곳:천리포 수목원 안에 한옥 등 숙박시설이 갖춰져 있다. 단체의 경우 예약하면 가이드의 해설도 들을 수 있다. 홈페이지(www.chollipo.org) 참조. 672-9982.
2012-11-01 2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