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 삶과꿈 에세이] 아빠와 함께 천왕봉 숨소리를 들었다

[걷기 | 삶과꿈 에세이] 아빠와 함께 천왕봉 숨소리를 들었다

입력 2010-07-18 00:00
수정 2010-07-1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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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람이 살결을 스치는 5월, 아빠와 나는 2년 전 실패했던 지리산 종주를 다시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빠는 “현우야, 아빠랑 같이 지리산 갈래?” 제안을 했고, 나는 그 물음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좋지!” 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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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우리 가족은 ‘지리산 종주’ 실패를 맛보았다. 아빠가 지친 엄마와 누나를 이끌고 무리한 산행을 하다가 결국 안전구조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하산을 해야만 했다. 그때의 실패요인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등산 장비. 그래서 이번에는 등산화와 등산복도 준비했다. 일과 공부에 사로잡혀 사는 아빠와 나는 3박 4일간의 여행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우리들의 가슴 부푼 ‘지리산 종주’. 아빠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갔을까, 잠에서 깬 아빠가 부랴부랴 짐을 챙기더니 남원에서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난 그러려니 하며 짐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가 내려야 했던 곳은 구례역이었다.

한 순간 아빠의 잘못된 선택은 앞으로 있을 험난한 여정에 비하면 작은 시련(?)에 불과했다. 남원에서 내린 우리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례까지 가는 버스까지 잘못 타 저녁 6시가 돼서야 겨우 구례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구례에서 지리산 노고단까지 가는 막차는 이미 떠나고, 대신 화엄사까지 가는 버스만 남았다는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처음 계획했던 노고단부터가 아닌 그보다 6km쯤 더 걸어야 하는 화엄사에서부터 천왕봉까지 그야말로 제대로 된 지리산종주를 시작하게 되었다(그것도 야간 산행으로…).

노고단까지를 목표로 한 발 한 발 힘차게, 어둠 속에서 나즈막이 들리는 계곡물소리를 따라서 걸었다. 한밤중에 바위 위에 매트를 깔고 잠도 자면서 올라갔다. 날이 밝아오자 우리 부자는 얼마 안 있어 곧 노고단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노고단에서 숙박을 했던 사람들과 어울려 아침밥을 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아빠가 전날 너무 힘들었는지 발이 많이 무거워 보였다.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결국 아빠는 어느 순간 바위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오늘은 연하천에서 쉬자고 말하는 아빠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앞장서 걷던 아빠가 목표였던 벽소령도 가지 못하고 지친 것이다. 아빠를 위해 다음날 하산하자고 했지만 다시 언제 오겠냐는 아빠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또 다시 묵묵히 걸었다. 점점 깊어지는 등산길 흙냄새와 나무냄새에 취해 힘든 것도 잊은 채 벽소령, 장터목까지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곳곳에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들에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장터목에서 다음날을 기다리던 중 여기저기서 사람들 탄식소리가 들렸다. 그중 우리 아빠도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고대하고 고대했던 천왕봉 일출을 궂은 날씨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가보자며 새벽 3시에 깨어 아빠와 함께 천왕봉을 올랐지만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은 끝내 나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기대했던 만큼 솔직히 실망도 컸다. 힘겹게 산을 오르며 정말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천왕봉 일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와 힘겹게 올랐던 길, 그리고 그 둘레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들. 그 깊은 울림에서 난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맑은 공기와 함께 살아 숨 쉬는 흙냄새, 종주하면서 만났던 친절하고 순박했던 많은 인연들, 무엇보다 철없는 아들을 내내 보살피며 이끌고 올라온 아빠에 대한 존경의 마음. 비록 천왕봉 일출은 못 보았지만 아빠와 나는 앞으로 살면서 함께 걸었던 이 깊은 마음의 울림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빛나는 뜨거운 해를 안고 하산을 했다.

글_ 신현우 서울 광진구 용곡중학교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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