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듯 잔잔한 일상… 운명앞에 의연한 그들
다음달 6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박근형 연출) 무대에 오르는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는 극 후반부 무대에 비스듬히 들이치는 붉은 조명이 유난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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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연극은 말레이시아 리조트에 은퇴 이민을 온 일본인들 얘기를 다룬다. 풍요로운 노후를 꿈꿨으나, 꿈은 꿈일 뿐. 끼리끼리만 모여서 놀고, 심심하면 일본 위성TV를 보고, 영화나 만화책도 구해다 보고, 일본 음식도 해먹고. 그래도 부족한 게 있으면 리조트를 드나드는 일본인 심부름꾼에게 부탁해서 구하면 된다. 이런 생활에 익숙하다 보니 말레이에 갓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글 호랑이를 입에 올리지만, 이들은 이국적 야생성을 뜻하는 정글 호랑이에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다.
극 초반 이쿠코(예수정) 얘기가 상징적이다. 해몽을 잘한다 해서 말레이 원주민 세노이족에게 일본 유명 엔카 가수가 나오는 꿈 얘기를 했더니, 엔카 가수를 알 턱이 없는 말레이 통역자는 유명한 아이돌 그룹 이름으로 대충 물어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단다. 근원적인 통약(通約) 불가능성. 말레이에 있되 일본처럼 살고, 일본처럼 하되 말레이에 산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저마다 사연도 있다. 겐이치(정재진)는 지병을 숨기고, 아키라(최용민)는 알코올중독자처럼 술을 마셔대고, 지즈코(서이숙)는 남편 바람기에 가슴앓이한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들이 무슨 대단한 사건인 양 떠벌려지는 것도 아니다. 노을빛이 퍼지듯, 잔잔하게 일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라는 단호한 선언투의 제목은 혹시 혼란스러운 세계에 압도되지 않고 의연히 버티기 위해 지상의 운명을 그대로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를 말하는 것일까.
관록있는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가 돋보인다. 특히 극 내내 신경증에 시달리는 지즈코를 낮고도 그윽하게 소화해내는 서이숙의 연기가 인상깊다.
한·중·일 삼국의 연극을 비교해 보자는 취지로 두산아트센터가 기획한 ‘인인인(人人人)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일본 작가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이다. 히라타는 18일 공연 뒤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05-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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