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8>서울의 문학 ② 박완서의 ‘나목’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 11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명동의 어느 뒷골목 풍경. 한국전쟁 중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주인공 이경과 옥희도가 걸었을 법한 들쑥날쑥하고 좁은 골목길이 아직 남아 있다. 오른쪽 위 잔디운동장이 한성화교소학교, 그 뒤는 주한 중국대사관이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834_O2.jpg)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 11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명동의 어느 뒷골목 풍경. 한국전쟁 중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주인공 이경과 옥희도가 걸었을 법한 들쑥날쑥하고 좁은 골목길이 아직 남아 있다. 오른쪽 위 잔디운동장이 한성화교소학교, 그 뒤는 주한 중국대사관이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834.jpg)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 11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명동의 어느 뒷골목 풍경. 한국전쟁 중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주인공 이경과 옥희도가 걸었을 법한 들쑥날쑥하고 좁은 골목길이 아직 남아 있다. 오른쪽 위 잔디운동장이 한성화교소학교, 그 뒤는 주한 중국대사관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 박완서의 분신인 이경과 화가 옥희도가 함께 근무하던 미8군 PX가 입주해 있던 옛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 앞 분수대 광장이 보인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924_O2.jpg)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 박완서의 분신인 이경과 화가 옥희도가 함께 근무하던 미8군 PX가 입주해 있던 옛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 앞 분수대 광장이 보인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924.jpg)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 박완서의 분신인 이경과 화가 옥희도가 함께 근무하던 미8군 PX가 입주해 있던 옛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한국은행 앞 분수대 광장이 보인다.
![](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1041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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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무튼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970년 봄 어느 날 단골 미용실에 가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뒤적이던 ‘여성동아’에서 여류 장편소설 모집이란 공고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며 소설을 쓰고 싶어졌던 것이다”고 ‘중년 여인의 허기증’이라는 산문에서 창작 동기를 밝혔다.
그러나 정작 ‘소설을 쓰고 싶어졌던’ 이유는 따로 있었던 듯하다. “S회관 화랑은 3층이었다. …나는 미처 화랑을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를 통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목을 보았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라는 대목이 소설에 나온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의 분신인 여주인공 이경이 남편 장태수와 덕수궁 은행나무 아래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한 독백이었다. 결혼은 장태수와 했지만 마음은 화가 옥희도에게 있었다.
여기서 S회관이란 지금의 남대문로 5길 37, 39 일대에 있었던 중앙공보관 건물 내 화랑을 말한다. 중앙공보관은 국정홍보를 담당하던 당시 공보실 건물로 나목의 모티브가 된 ‘박수근 유작전’이 1965년 열린 곳이다. 작 중 옥희도의 모델이 된 화가 박수근은 회고전을 준비하던 중 타계하면서 첫 개인전이 유작전이 됐다. 나목은 박수근이 1962년에 그린 ‘나무와 두 여인’이다. 박수근의 유작전을 본 박완서는 나목을 집필했다. 북창동 전주회관 뒤편 옛 중앙공보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보사거리에서 보이는 옛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 아시아미디어타워). 2005년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앞두고 70년 된 유서 깊은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943_O2.jpg)
![명보사거리에서 보이는 옛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 아시아미디어타워). 2005년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앞두고 70년 된 유서 깊은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0943.jpg)
명보사거리에서 보이는 옛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 아시아미디어타워). 2005년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앞두고 70년 된 유서 깊은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1894년 청일전쟁 패배 이전 3000명이 넘는 중국인이 조선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다 일본인에 의해 쫓겨났다. 1945년 일제가 패망, 1948년 중화민국 대사관과 한성화교소학교가 들어서면서 청요리집, 중국과자집, 생활용품점, 환전소, 여행사, 약재상 등이 들어섰다. 1970년 서울거주 전체 외국인 1만여명 중 80%가 중국인이었다.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서울도심재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화교들은 서울 한복판 차이나타운에서 내쫓겼다. 서울은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대도시가 됐다.
![낡고 허름한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관.](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1003_O2.jpg)
![낡고 허름한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관.](https://img.seoul.co.kr//img/upload/2019/06/19/SSI_20190619181003.jpg)
낡고 허름한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관.
사람들이 직접 체험한 한국전쟁의 실체는 피난이다. 피난은 전쟁의 참화를 모면하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상호적대적인 사상과 체제에 대한 선택이기도 했다. 두 번의 피난(1950년 6월 28일, 1951년 1월 4일)과 두 번의 복귀(1950년 9월 28일, 1951년 3월 15일) 과정에서 서울은 기원전 도시생성 이후 최대의 수난을 겪었다. 불과 10개월 사이 각각 90일과 60일에 걸쳐 발생한 일대 사건이었다. 도합 150일 동안 남과 북,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번갈아 점령했다. 이는 장차 서울이라는 지역과 서울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다.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함락과 수복을 자신과는 무관한 권력과 이념의 다툼으로 인지했지만 전쟁 과정을 통해 서울은 이데올로기의 불꽃이 번쩍이는 비극적 도시가 된다. 1950년 6월 28일 제1차 함락 이후 피난을 못 가거나 안 간 잔류시민들은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1950년 9월 28일 1차 수복으로 서울을 떠났던 피난민이 다시 돌아오면서 도강파는 ‘반공 시민’의 지위를 보장받은 반면 잔류파는 적 치하에서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고, 반대의 경우 보복을 각오해야 했다. 부역과 전향이 반복됐다.
서울은 1차 인공 치하 90일간 벌어진 일로 배신과 보복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4 후퇴로 우려하던 2차 서울점령이 현실화하자 서울은 텅 비었다. 1949년 140만명이 살던 대도시가 노인과 환자 그리고 그를 돌보는 극소수 가족만 남고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서울을 떠났다. 인민군이 가할 억압과 국군에게 당할 고초를 피하고자 했다. 이는 1951년 3월 15일 재수복으로 실현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돈의 정체성이 이 과정에서 잉태됐다. 박완서의 나목 연작은 이 시기 서울과 서울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9회 3·1운동 표석을 찾아서
일시 및 집결장소: 6월 22일(토) 오전 10시 종각역 4번 출구 보신각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2019-06-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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