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民草들의 편지에서 드러난 혼란상

해방기 民草들의 편지에서 드러난 혼란상

입력 2010-02-16 00:00
수정 2010-02-1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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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미군정에 잠입한 과거의 친일파들이 모리배와 결탁해 갖은 악질 행위를 감행한 탓에 민중은 극도의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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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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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해방기 민중의 편지’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웨드마이어 사절단이 받은 ‘한국인들이 보낸 편지’가 16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이 편지들은 해방 직후 미국 군정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한 사회의 혼란상에 대한 한국 민중의 현실인식과 비판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고 있다.


해방기 한국인들이 미국 웨드마이어 사절단에 보낸 편지에는 당시 혼란한 사회상과 민중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6일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 이들 편지에 담긴 당시 남한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민 경제가 붕괴하면서 빚어진 고도의 인플레이션과 물자부족, 생활고였다.

일본 홋카이도 탄광에 강제징용됐던 이창진씨의 편지에는 “큰 꿈을 품고 고향에 들어왔지만 정말 죽을 지경이올시다. 홋카이도에서 같이 돌아온 여럿은 도로 일본으로 밀항해 가고 말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혔다.

다른 사람이 작성한 편지는 “식량배급이 천오백인데 3분의 2 이상이 보릿가루라 조선인에게는 맞지 않지만 이나마도 보름치밖에 안 돼 생계를 유지하려면 암시장에서 쌀을 사야 합니다”라고 하소연했다.

민생고의 원인은 생산시설을 독점하고, 부패한 배급행정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모리배들 때문으로 지적됐다.

우익청년단 등이 군정관리와 결탁해 배급대상 인원을 조작하고 더 많은 배급표를 받고서 이를 모리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등 행태를 보였다는 증언이 편지에 담겨있다.

한 무기명 편지는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일제 이상의 가혹한 방법으로 인민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인민은 배가 고파도 감옥에 끌려갈까 봐 감히 배가 고프다고 하지 못합니다”고 고발했다.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임금과 식량을 달라는 이들조차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거나 ‘야만적 테러’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 경남 군정관 F.E.질레트는 “반동적인 모리배로 구성된 비애국적이고 비민주적이고 무자비한 그룹의 존재가 (야만적 테러)의 원인이다”라고 지적하고 “사업가, 관리, 경찰에 집중적인 민주주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우익청년단 등을 중심으로 도시는 물론, 전국 농촌사회에서 자행된 무차별적인 테러도 민중들의 고발 대상이었다.

한 무명의 농민은 “어느 날 저녁 완장을 찬 청년 50명이 트럭을 타고 와서 삐라를 붙였다며 무조건 마을 사람들을 구타했습니다. 이에 대항하자 경찰은 우리 농부만 유치장에 넣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동대문구에 살던 이득신씨는 “반탁테러단은 좌익 탄압을 경찰로부터 위임받아 무고한 사람들까지 구타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민중은 미국에 반감을 갖고 좌익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웨드마이어 사절단은 이런 편지를 통해 남한의 우익이 민중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서도 냉전 대결 구도 속에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우익이 주도하는 남한 반공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이들 편지를 공개한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과정 대학원생 정무용씨는 “미국은 남한총선거를 반대하거나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공산주의자로 간주돼 탄압을 받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서도 우익을 선택했으며 이러한 까닭에 1972년에 이르기까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 상원군사외교위원회는 1951년 웨드마이어 보고서의 한국 부분을 발간했지만 ‘우익이 한국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부분은 삭제했다가 1972년에야 삭제부분이 포함된 한국편을 재발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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